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면

치유에 대한 압박감

by 무쌍

울을 가로질러 도서관에 가 있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 하얗게 남은 화단이 보이고, 나와 반대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은 마스크와 모자로 가린 채 모습을 분간할 수 없었다. 나만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듯 앞은 텅 빈 거리였다. 깊은 어둠에서 침묵을 하느라 찬바람이 냉정하게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 람은 없지만 차가운 공기 틈에 걷는 일은 견딜만했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통증 때문에 자꾸 멍든 곳을 더듬어 보게 했다. 계절이 끝이 날 때는 아픔도 시간 뒤로 옅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화단엔 생기도 없고 표정도 없는 감정이 바짝 말라버린 풍경이었다. 지난날 뜨거운 태양 아래 청춘은 건강하고 생기가 넘치고 생긴 대로 자유롭게 피어났을 거라고 애써 상상해 보았다. 나비가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나무수국 꽃가지에 말라버린 꽃잎이 있었다. 나무수국은 꽃다발처럼 탐스러운 꽃들은 어디로 보냈는지, 구멍이 숭숭 뚫린 꽃잎이 바람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물처럼 촘촘하고 섬세하게 구멍이 난 꽃잎은 내어 줄 것은 모두 나눠준 듯 욕심 없고 예민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 보였다.

시든 꽃잎(나무수국꽃 2022.01 songyiflower@instargram)

이미 다 말라 버린 꽃송이처럼 지난 일이었다. 꽃이 피었을 땐 몰랐다. 시들어 버린 꽃을 보며 우울해지는 건 아마도 그 이유일 것이다. 한창 핀 순간에 내가 꽃송이라는 걸 몰랐고, 다 깨달은 순간엔 다 시들어 버린 꽃만 남 버렸기 때문이다.

억지로 괜찮은 상태를 만들려고, 너무 애쓰며 나 자신을 등 떠밀었다. "잘될 거야."라는 말로 매일 나를 타일렀지만, 사실은 다그치고 나를 추궁하듯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좀 멈추고 싶다. 급하게 괜찮아지려다가 더는 못 갈지도 몰랐다. 고통을 감추느라 애쓰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버린 듯했다.


치유에 대한 압박감을 내려놔야 했다. 사실 완전히 치유된 상태가 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과 단절을 했지만, 모든 아픔은 내 안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상처가 완전히 회복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관습으로 굳어진 사고방식과 행동을 벗어 던지기 어렵다. 털어놓기가 망설여졌다. 누군가에게 손 편지를 보내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였을까? 도서관 서가에서 편지글을 묶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두 권의 편지글을 즉흥적으로 빌렸다.

작가들의 친필 편지를 묶은 <작가들의 편지>에선 짧은 편지에서도 이야기는 생생했다. 나도 그들처럼 내 사정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작가들의 편지는 그들의 작품만큼이나 호감을 주었다. 손편지라 작가들의 필체를 구경하는 재미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과 생계에 쫓기면서도 다음 작품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다는 즐거움을 쓴 발터 벤야민의 편지는 편지한 장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실비아 플러스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는 어떤 여지도 주지 않으려는 듯 빽빽한 단어들이 얼핏 보면 글이 아니라 패턴 무늬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완고하고 열정이 넘치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 듯 보였다.


다른 한 권은 우울증을 겪어낸 사람들의 치유 편지를 묶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라는 책이었다. 우울증을 극복한, 극복하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책 속에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따뜻한 친구처럼 말을 걸어 주었다.


"저는 나아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견디기 힘든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안의 어둠은 사라졌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태양은 다시 떠올라요."
"치유는 느릿느릿 진행돼요."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지만 말고 빗속에서도 춤추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치유의 길은 다사다난할 거예요."
"우리가 당신 말을 들어줄게요. 우리가 당신을 이해해 줄게요. 당신이 극복해 온 일들에 주목하세요. 당신은 생존자예요. "
"지금 당장은 너무 애쓰지 말 것, 이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을 읽고 나니, 편지를 쓰는 대신 일일이 답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이 글이 답장을 대신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면, 저는 당분간은 괜찮지 않은 채 지내볼게요. 당신들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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