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가 풀렸다고 해서 문학성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왜 키츠의 <라미아>에서 법칙과 선의 철학은 '차갑고' 모든 매력이 달아나 버리는 것일까? 이성이 도대체 왜 그렇게 위협적인가? 미스터리가 풀렸다고 해서 문학성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많은 경우에 해답이 수수께끼보다 더 아름답고, 한 수수께끼의 해결은 언제나 다음 수수께끼를 드러내 주기 때문에 더 위대한 시정을 불러일을킬 수 있다. 저명한 이론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먼은 친구로부터 과학자들이 꽃을 연구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놓친다는 비판을 듣게 되었다. 파인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가 보는 아름다움은 나에게도 보이네, 하지만 나는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없는 더 깊은 아름다움도 본다네. 꽃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상호 작용을 본다는 말일세. 꽃의 색은 붉은색이네. 식물이 색을 갖는다는 사실이 곤충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진화했음을 의미할까?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네. 곤충은 색을 볼 수 있으까? 미적 감각이 있을까? 이렇게 계속되는 것일세.
- 「무지개를 풀며 -리처드 도킨스」
이 문장들을 보고서 곧바로 찰칵,
나의 연인의 태도를 대변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라는 사람 역시도 그렇다.
이성과 감성, 과학과 문학(예술)은 상반된 것이라 생각하는 편견들에 대해 그와 여러번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분야 간의 장벽이 높은 듯 보이지만 결국에서 '예술' 및 '철학'으로 시작되고 귀결되는데.
결국 모두 하나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이야기?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물망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 늘 매력을 느껴왔다.
이성과 감성을 나누지 않고 늘 오고 가는 사람,
분야를 나누지 않고 자신의 관점대로 연결시켜나가며 자신의 풀을 확장시키는 사람,
이런게 글과 말, 취향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에 늘 매력을 느낀다.
이렇게 풍부한 사람에게는 은은한 향이 난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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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가 풀렸다고 해서 문학성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많은 경우에 해답이 수수께끼보다 더 아름답고,
한 수수께끼의 해결은 언제나 다음 수수께끼를 드러내 주기 때문에 더 위대한 시정을 불러일을킬 수 있다.
이 문장을 읽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꼬여있던 고리들이 풀리면서 머리 속이 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