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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Feb 16. 2021

가족을 꾸리는 것에 대하여

잊을 수 있을까?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나는 어느새 스물아홉이 되었고, 이제 누구를 만나도 넌지시 결혼을 상상해보는 나이.

나는 아니라고 할 지라도 주변에서 결혼 소식이 들리고, 앞으로 한 명, 두 명, 많으면 세네 명 중에 누군가와 결혼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


이혼 가정에서 자란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약속은 변할 수 있고, 진심도 변할 수 있다. 상대도 나도 최선을 다해도 그만두는 것이 나을 수 있다. 결혼이 결말이 아니라 다른 시작임을 아는 것, 그 이후가 그리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이별하는 것이 함께 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부모님이 이혼한 상태일 때와 엄마가 자살한 이후가 얼마나 달랐는지 기억한다.

부모의 이혼은 흔한 데, 자살은 흔하지 않고, 엄마의 자살은 더 흔하지 않다. 부모의 이혼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엄마의 자살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대체로 말하지 않을수록 좋았다. 나와 내 친구들은 부모의 이혼을 축하했지만, 부모의 죽음은 결코 축하하지 않았다. 물론 없는 것이 나은 부모는 논외로 하고.



나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지나간 애인들이 왜 우리 엄마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고민했다.


무의식적으로 밀어내는 것 아닐까?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깨닫는다. 나는 그 사람들이 나를 아끼지 않아서, 혹은 나의 슬픔을 돌봐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만 감당하기 어려워서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잊는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구나.  사람들 마음은 진심인데, 그게 함께 해주기에는 어려운 일인 거구나.’라고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 부모의 기일을 잊는 사람과 만날 수 있을까 하다가도, 그걸 잊을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잊을 수도 있는 거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슬펐다. 잊을  있는 거라면 잊지 않을 수도 있는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경험상 잊은 적이 잦았으므로, 내가 원하는 걸 명확히 요구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 그날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말을 하고 부탁을 했어야 하는 데 그러지 못했다.


못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나는 내가 기일을 어떻게 보내기를 바라는지 알지 못한다. 늘 보내오던 방식은 의식이 날카로워진 채로 그냥 평상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다른 방법이 있다고 들어는 보았지만 실천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기엔 겁이 많았고, 누군가 같이 하자고 나를 끌고 가주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어떻게 보내고 싶은 지 안다고 한들 그걸 부탁하는 것은 비참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 스스로는 엄마의 자살로 비롯된 어떤 패턴, 감정, 기억을 잊고 살기를 바라면서도 누군가가 그걸 잊지 않고 나를 보살피길 바란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건 대체로 가능하나 가끔씩은 버겁고, 끝내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살필 거라는 걸 알지만 그걸 스스로 한다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되곤 한다. 혼자 나를 달래고 위로할  있다는  자체가 상처가 된다. 혼자 할 수 있게 되는 이유는 대체로 혼자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내 남은 가족은 내게 제사를 지내자고 말하지 않는가? 이혼한 지 너무 오래된 아내이므로.

왜 찾아가자고 하지 않는가?

아빠가 아니라면 다른 가족들은 왜 그러지 않는가? 핵가족 시대라서 형제의 이혼한 아내 혹은 조카의 엄마까지 챙기기는 무리다.

왜 나는 외동인가?


번듯한 가족사진이라고는 걷지도 못하던 시절 또는 빛바랜 스티커 사진.


가족을 꾸리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친정 엄마가 없는 결혼 생활이 두렵다는 생각도 든다.

자녀를 낳는 것은 자녀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가진다면 꼭 두 명을 낳아야지. 혹은 낳지 않아야지.

문득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데 두 명을 낳아도 한 명이 어떻게 될지 혹은 둘 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닌가?



잊을 수 없겠지. 아마 그럴 거다.

돌이킬  없는 누군가의 선택은 남은 사람들의 삶도 돌이킬  없게 만드는구나. 

가끔씩 만약을 가정한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어려움에 대처하는 인간이 되어있을까?

가족을 꾸리고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다정한 느낌을 받았을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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