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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Apr 02. 2021

자살 유가족이 겪게 되는 것: 분노

대상이 사라진 분노는 스스로에게 향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지?
‘그냥 쉬다 올 수도 있잖아, 아니면 막 울거나 술을 먹거나 뭐 다른 것들도 있는데 왜 하필 자살을 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고인에게 들리지도 않을 질문을 외치다 보면, 비슷하지만 다른 질문이 나에게로 향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고인이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삶은 계속된다. 당연히 그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자식이 죽으면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사라져서, 배우자가 죽으면 나와 힘든 세상을 헤쳐나가기로 약속한 동료가 사라져서, 부모가 죽으면 나를 돌보던 울타리가 사라져서, 나를 괴롭게 하던 사람이라면 갑자기 그 문제가 무언가 내가 해보기도 전에 사라져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한다.


배우자가 죽으면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부모가 죽어도 마찬가지다. 자살은 전혀 예상치 못하다가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경우도 잦아서 이 경우 생겨난 경제적 문제를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한다. 자식을 잃으면 마음의 고통은 신체적 질병으로 쉽게 변했다. 그리고 신체적 질병은 큰돈을 쓰게 한다. 돈과 건강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와 더불어 감정을 어지럽히는 슬픔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 복잡한 혼란을 그대로 맞으면서 계속 살아갈 생각을 해야 한다.


‘맞는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데, 그 모든 감정적인 혼란과 동시에 우리는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이야기하고, 웃고 그러다가 스스로에게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이야기하고, 웃었다는 사실에 경악하기 때문이다. 고인과 어떤 관계였던지, 그 사람이 이제 없는 세상에서도 남겨진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다 보면 화가 난다. 나를 남겨두고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분노한다. 화를 내고 싶은데 화낼 대상은 이미 죽고 없다. 사실 나는 아무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어렸고, 어렸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내가 화가 난 줄 조차 몰랐다. 그리고 10년 즈음 지나고 나서 내가 화가 났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인에게 분노하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오랜 기간, 어쩌면 지금도 그랬다. 고인은 화를 내기에는 너무 안타깝고 서글픈 사람이다. 분노보다는 밉다 정도에 가깝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매사에 짜증은 나더라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이유는 그 어떤 것도 이 사건이 내게 닥친 것에 대한 분노보다 크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참을 수 있었기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분노는 표출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 어떤 분노도 엄마의 자살에 대한 내 분노보다 더 크지 않았을 거다.

분노가 표출되지 못하거나, 혹은 표출할 대상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고인은 이미 없기 때문에 화풀이할 다른 대상을 찾는다. 다른 가족이기도 하고,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기도 하고, 어떤 사건이기도 하다. 다 큰 성인 자녀를 잃은 경우 배우자는 주요 분풀이 대상이며, 자식을 잃은 경우 가족이 아닌 남들조차 쉽게 부모를 탓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가족 중 누군가를 탓하고 있다면, 탓하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 한다. 말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런 말은 가능하다면 심리 상담가나 혹은 리더가 있는 유가족 모임이나 전문가 앞에서만 하는 것이 좋다.


분노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데, 대상은 이미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쉽지만 탓할 곳을 아무리 찾아도, 아무리 다른 무언가나 누군가의 탓으로 고인이 죽었다고 믿고 싶어도 고인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행위를 직접 한 것이 그 사람의 의지였다는 것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 분노를 받아줄 수 없다. 마지막에 유서 같은 걸 남기고 미안하다고 했더라도, 내 분노에 대한 사과는 결코 해주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감히 쉽게 추측한다.


대상을 잃어버린 분노는 대부분 본인에게로 온다.

‘어떻게 눈치를 못 챘지?’
‘정말 눈치를 못 챘었나?’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었지?’

스스로에게 향하는 분노는 다스리기 쉽지 않다. 분노하는 사람과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동일한 사람일 때 우리는 누구 편을 들어줄 것인가? 그게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이라면? 그건 내 탓이 아니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걸까. 아직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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