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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Sep 28. 2022

여행기는 읽지 않지만 시는 읽는 이유

이해하지 못해도 아무도 언짢아지지 않는 글

좋아하는 책의 종류는 매번 바뀌었다. 어떤 때는 추리소설을, 만화책을, 진지한 고전 문학을, 한국의 현대 문학을, 나라 별로, 작가 별로. 시간이 지나자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다.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마음을 줄 주인공을 찾지도 혹은 분노할 대상을 찾지도 못한 채 아직도 '승'이군 하며 덮었다. 아름다운 묘사는 결론으로 내달리고 싶은 마음을 방해했다. 한때는 영화를 즐겨봤지만, 영화를 보지 않게 된 것처럼 소설도 읽지 않게 되었다. 

 

비문학을 소설보다 더 좋아했다. 결론과 주장이 있고 근거가 있는 글들. 근거가 얼마나 정확한지, 충분히 자료를 수집했는지 혹은 근거에 따른 주장은 얼마나 잘 짜여 있는지, 그 주장은 얼마나 매혹적인지 생각할 거리가 많아 바쁘다. 작가가 근거에 따라 결론을 내린 것인지 혹은 결론에 맞는 근거를 찾아간 것인지 가늠하면서 판단하고 평가한다. 설득당하거나 더 크게 반대하면서 읽는다. 생각을 바꾸게 하는 글들을 만나는 건 드물더라도 귀하고 소중해서 아끼게 된다.  


에세이는 즐기지 않았다. 가끔 마음이 가는 글이나 문장을 발견한다. 일기랑 에세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글을 읽다가도 독특한 시선을 찾으면 작가 이력을 찾아보았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 전업 작가일까? 삶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반대로 여행기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여행기에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너무 많은 정보가 있었다. 여행기의 모든 장면과 순간, 만난 사람들에 대한 묘사들은 내가 살면서 볼 수도 있을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지 못했다. 인터넷에 적힌 후기도 여행지를 기대하게 만드는데 이상했다. 왜지? 


비문학 글들은 사실과 주장의 조합이다. 나는 읽으며 작가와 싸우거나 혹은 작가의 편이 되어 세상과 싸운다.  문학은 허구로 지은 또 다른 현실로 나를 초대한다. 투쟁은 잠시 잊는다. 작가의 상상이 나를 소설 속 주인공으로 혹은 주인공들을 관찰하는 누군가로 불러 세운다. 같이 웃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소리 지르거나 절망한다. 에세이는 현실인 척하는 허구다. 누구나 있을 법한 상황과 작가의 시선이 합쳐서 내게 새로운 세계관을 잠시 체험하게 해 준다. 


여행기는 현실인지 허구인지 분간이 안 간다. 소설은 확실히 현실은 아니고, 비문학도 현실이 아니다. 에세이는 나도 일상을 살아가니 어느 정도가 현실인지 가늠할 수 있다. 적어도 내 현실에서는 여기까지가 현실이고 저기 있는 에세이의 장면은 허구다. 반면 여행기는 분명 에세이의 한 축인데, 여행을 몇 번 안 가봐서 그런 걸까 발이 닿지 않는다. 여행기에 담겨있는 현실에 나는 발이 닿아 있지 않고, 아주 많은 정보와 상상하기 어려운 묘사에 어지러워하며 끝난다. 


여행기는 알아야 할 게 명확한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는 읽기다. 그런데 시는 내게 잘 모르겠는 게 전부인 글 읽기다. 알아야 할 게 명확한 지 조차 확실하지 않다. 불명확한 게 전부인 글 읽기. 시는 여행기처럼 어지럽다. 


질문 1) 현실인가요? - 아니오. 

질문 2) 허구인가요? - 네. 

질문 3) 허구로 지은 또 다른 현실인가요? - 음, 글쎄 그걸 현실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질문 4) 공감이 가나요? - 가끔 그렇고, 대체로 아니오. 

질문 5) 당신을 그 장면으로 초대하나요? - 대체로 아니죠.  

질문 6) 주장과 근거가 있나요? - 글쎄요. 그걸 있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시를 읽을 때 위로받고, 화내고, 슬퍼하고, 안심한다. 하지만 내가 왜 그 시를 읽고 그렇게 느끼는지 어느 것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수능 언어가 아니라서 더더욱 그렇다. 알 수 없는 세계. 여러 번 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세계. 작가가 의도한 바와 내가 느낀 바와 다른 독자가 느낄 바가 완벽히 불일치할 수도 있다는 직감만 오히려 명확하다. 심지어 시인의 말도 시집 마지막에 붙은 해설도 모두가 각기 다른 이야기 하는 것 같은 글 조각들의 모음집. 


시는 내게 이해하지 못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글이다. 얼마나 이해했는지 혹은 얼마나 느꼈는지 조차 중요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되는 만큼만 느끼고 이해하고, 원한다면 더 해석해보고 아니라면 그냥 스윽 읽고 느껴지는 흐릿한 감각에 의존한 채 덮어버려도 아무런 찝찝함도 남지 않는다. 이해를 못 하면 못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종류의 글이다. 시인이나 평론가나 시인이 되고픈 이들이 본다면 화가 나거나 어이가 없을까? 모르겠다. 왠지 아닐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어떤 시인은 1000명이 시를 읽는 것보다, 한 명이 1000번을 읽어 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언어란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어느 것도 소통되지 않는 기분이 느껴질 때조차도 그 시는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시의 기능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나는 그저 내 기분을 조금 더 나아지게 혹은 가라앉게 하는 데에 시 읽기를 활용한다. 멋대로 다르게 이해하면 수능 언어 시험 제출자와 문학 비평가와 시인은 조금 언짢겠지만 사실 아무 일도 안 생긴다. 1000번을 읽으면 읽을 때마다 다르겠지만 여전히 무엇 때문에 다르게 느끼는지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거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는 글들을 읽고 즐길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정보를 습득하고, 이해하고, 활용하는 게 미덕이자 의무인 삶 속에서 의무를 모르는 척해도 된다니. 평화롭다. 심지어 전체가 아닌 일부만, 한 편의 시에서 한 두줄만 뽑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고 곱씹어도 아무도 언짢아하지 않는다. 다행히 나는 국어국문과도, 문예창작과도 아니고, 평론가 아버지도 수능 출제위원 어머니도 두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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