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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Sep 16. 2021

조직은 나이 든 신입사원이 낯설다

대학생 때 활동한 문학동아리에 사십 대 학부생이 있었다. 그는 철학과 졸업 후 논술강사로 이름을 날리다 갑자기 문학이 하고 싶어져 수능을 다시 봤다고 한다. 국문과에서 문학강의만 골라 듣던 그는 매주 새로운 시와 소설을 써오곤 했다. 그가 사용하는 어휘의 폭은 누구보다 넓었고 대체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적절했다.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핍진성"이라는 단어였다. 어느 술자리에서 그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소설에 대해 핍진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했다. 나를 비롯한 동아리원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맥주잔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생전 처음 들어본 단어였기 때문이다.


핍진성이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대사, 상황이 얼마나 개연성 있고 사실적인지를 의미하는 정도였. 쉽게 말해서 보기에 그럴듯하면 핍진성이 높고 억지스러우면 핍진성이 낮다고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핍진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관습,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문화적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었다.



나이 든 신입사원은 보수적인 직장에서 핍진성을 떨어트리는 캐릭터다.


안타깝게도 내가 다니는 직장은 30대 중반의 신입사원을 매우 불편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그 나이 먹도록 뭘 했길래 입사가 늦었냐는 의문의 눈길이 따라다닌다. 졸업과 동시에 직장을 골라 들어갔 팀장, 부장 세대는 특별한 이유 없이 입사가 늦어진 걸 이해하지 못한다. 청년실업 문제는 "특별한 이유"로 쳐주질 않는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직장에서 이직해온 신입사원을 곱게 보는 것도 아니다. 입사 환영식에서 임원이 "너 같은 애들이 막 졸업한 진짜 청년들 기회를 뺏는 거야"라며 블라인드 채용의 문제점을 한 시간 내내 설파하는 식이다. 그럼 난 '자녀가 취준생인가' 속으로 생각하며 "소중한 기회를 주신 만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다. 나와 동갑인 과장은 "로열티 없이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는 애들은 조직 입장에서 별로죠"라며 "뭐 라니씨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이라고 첨언한다. 입사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라니씨는 잘하면 부장도 못 달고 정년퇴직하겠네요"라는 이야기였.





비슷한 나이에 입사해 비슷한 생애주기를 공유하는 사람이 다수인 조직에서 나이 많은 신입사원은 불청객과 같다. 선배 입장에선 본인보다 나이 많은 신입사원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한두 살 차이야 그렇다 쳐도 대학생 때 화석학번이었던 사람이 후배로 입사하면 편하게 대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어떻게 할지 고민되는 건 물론이고 '나이 많다고 편하게 일하려는 거 아냐?' 하는 편견을 가지기도 쉽다.


이전 직장은 공공기관 특성상 신입사원 연령대가 다양해 나이 많은 신입사원은 이슈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직장은 제대로 된 공채와 블라인드 채용제도가 도입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나이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우선 경계하고 보는 분위기다. 첫 직장 프라이드를 주입하기 쉽고 기존 직원들과 융화되기 쉬운 어린 직원을 뽑아 오다가 블라인드 시스템 도입으로 채용과정에 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못하게 되자 생긴 부작용 같기도 하다.


나이 많은 신입사원을 앞에 두고 나이 많은 신입사원은 별로라고 이야기하는 건, 고인물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의 핍진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다. 낯선 존재를 '우리'의 영역에서 배제함으로써 장유유서 문화가 진하게 배어 있는 조직의 자연스러움을 지키려는 것이다. 편협한 태도지만 그렇다고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마이웨이가 체질이라 이방인 취급이 오히려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상황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상황을 개선하려면 나는 너희의 적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야 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했고, 존경하는 선배님들께 열심히 배워서 조직에 보탬이 될 의지가 충분하다는 메시지 말이다. 이미 사회생활을 해본 신입사원의 강점은 미리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떤 말과 행동이 적절하고 부적절한지 체득했다는 것이다. 나이라는 핸디캡은 성숙한 연기로 채워나가면 그만이다.


우리에겐 무례한 발언을 들었을 때 발끈하는 대신 지혜롭게 대처하는 스킬도 하나쯤은 있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남는 에너지를 가정과 취미, 재테크에 쏟는 게 똑똑한 삶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 맞춰줄 건 맞춰주며 상대방의 경계심을 낮추는 게 남는 장사다. 그래야 나이 많은 신입사원을 배타시하는 소모적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더 중요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다.




내게 핍진성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준 형을 동경했다. 늦은 나이에 원하는 일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용기와 결단력이 부러웠다. 난 여전히 그를 존경하지만 이유는 다르다. 정해진 노선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자신의 선택을 온전히 믿고 성실하게 앞으로만 나아간 그의 태도가 멋있게 느껴진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시간들이 모여 그의 선택은 핍진성이 무진장 높은 서사로 자리잡았을 것만 같다.


조직에 속한 타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이전에, 내 세계관을 살아가는 유일한 주인공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게 먼저라는 생각도 든다. 어떤 캐릭터든 자신만의 서사가 있고, 타인이 그걸 인정해주느냐는 나중 문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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