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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n 24. 2024

우리 손으로 도배를 했다

안방 도배를 직접 했다. 벽지가 올드한데다 여기저기 들뜬 상태였다. 언젠가 갈아엎겠다고 벼르던 참에 재고 벽지를 싸게 파는 곳을 찾았다.

화이트 실크벽지와 초배지, 풀, 본드를 주문했다. 그리고 창고 구석에 고이 모셔놓은 장비를 꺼냈다. 작년 도배학원에 다닐 때 사놨던 아이들이다.

다음 할 일은 안방 비우기였다. 화장대와 장롱을 낑낑대며 작은방으로 옮겼다. 매트리스까진 거실로 뺐는데 프레임은 도저히 옮길 수가 없었다. 비닐로 보양하고 작업하기로 했다. 남은 날은 도배사들의 유튜브와 블로그를 보며 공부했다.





대망의 토요일 아침, 아내와 난 최첨단 슈트를 입는 아이언맨의 심정으로 작업복과 마스크, 목장갑을 장착했다. 오늘은 벽지를 철거하고 초배까지 마치는 게 목표였다. 아내에게 기초적인 요령을, 그러니까 찢고 뜯으면 된다고 알려줬다.

아내는 "하면서 배우자는 거지?"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고, 난 "역시 자기야" 하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벽지를 찢고 뜯고 기침을 하다 보니 반나절이 지났다. 에코텍스라는 친환경 벽지로 제법 그럴싸하게 초배를 마쳤다. 어느새 밤하늘엔 초승달이 떠 있었다. 24시간 뼈해장국집에서 든든하게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고비는 다음 날이었다. 벽걸이 에어컨이 달린 채로 벽지를 붙이려니 연달아 실패했다. 에어컨 부분을 깔끔하게 잘라내면서 풀이 안 묻게 작업하려니 초보자에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내가 벽지를 받쳐주는 동안 내가 천천히 자르니 제법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왔다. 역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자화자찬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반달이 뜰 때쯤 모든 게 끝났다.

돈을 주고 맡긴 것만큼의 퀄리티에는 당연히 못 미쳤다. 그 고생을 할 바에야 차라리 돈을 주고 맡기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결과물을 온전히 우리가 향유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회사에서도 온 힘을 다하지만 정작 내 것으로 남는 건 없다. 한 달에 한 번 월급으로 환가되고 끝이다. 어떤 일을 할지 내가 정할 수도 없고, 그 결과물을 내가 가질 수도 없다. 아주 잘 해야 보람과 자기만족을 얻을 뿐이다.

하지만 퇴근 뒤 씻고 침대에 누우면, 아내와 내가 직접 옷을 입힌 우리의 공간이 펼쳐진다. 그 색깔은 선명하다. 손을 뻗으면 딱딱하게 만져진다. 그 안에서 우린 기분 좋게 잠들 수 있다.




논객닷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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