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 및 동영상 출처: 다음 영화
영화 자체가 한 편의 시처럼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점이 일반 상업 영화와는 차별되나 그 상징들이 전형적이고 설명적이어서 다소 심심한 점은 없잖아 있다.
학창시절 한 편의 시를 배울 때 선생님께서 시어들의 의미를 해석해주셨던 것처럼 극 중 인물들과 대사, 장면들이 하나 하나 정답처럼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별로 없다.
하지만 '제주도'를 배경으로 '시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흔한 이미지와 느낌, 이를테면 '잔잔하고 아름다운 풍광 속에 분위기 있는 외모를 지닌 시인의 로맨틱한 사랑'과는 정 반대의 느낌을 주려 한 점은 꽤 인상적이다. '흔한 어촌 마을에 소심하고 못생긴 시인의 좀 이상하고 없어보이는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영 시간 내내 '시'와 '사랑'을 비롯한 갖가지 상징과 뭉클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굉장히 현실적이다 못해 찌질한 느낌을 주는데, 그 '내용'과 '표현' 사이의 이질감이 이 영화의 매력이고 관객들에게 유머로 다가온다.
일단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다. 주인공인 시인은 결혼한 지 좀 됐지만 아이는 없다. 어느 날 시인은 우연히 한 청년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극 중 인물들은 갈등을 겪게 된다.
시인은 만족스러운 시를 써내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사랑도 그리움도 이젠 먼 옛날 이야기이다. 그 옆에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크산티페와 같은 아내가 있다. 뼛속까지 현실적인 그녀는 아이를 낳아 키우길 원하지만 시인에게는 정자가 별로 없다. (그나마 몇 있는 애들이 활동을 별로 안한다.)
어쨌든 그의 관심은 오로지 '시'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를 써낼 수 있는 힘, 사랑, 슬픔을 원한다. 그가 '사랑'을 그리워할 때, 아내는 시를 위한 '비극'이 필요했던 거라며 그것을 단지 쓸모 없는 '품위'로 치부한다. 단지 아이를 갖기 위해 품위 없는 성관계를 원하는 아내에게 치가 떨리는 것은 그에게 '아이'는 '진짜 사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성화에 마지못해 병원을 들락날락하며 우울해하던 때, 아내는 집 앞 새로 생긴 도넛 가게에서 사왔다며 싫다는 그에게 억지로 도넛을 먹인다. 가뭄에 단비처럼 오감을 사로잡는 도넛에 미쳐서 그는 밤낮없이 도넛가게로 향하게 된다. 젊고 아름다운 도넛 가게 청년. 우연히 마주하게 된 그 청년은 마치 달콤하고 유혹적인 도넛처럼 끊을 수가 없다. 변화도 없고 자극도 없던 그의 일상에 '이상한 감정'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시인과 청년
'이상'을 꿈꾸는 이들
시인과 청년은 참 달라 보인다.
'큰 굴곡 없는 삶, 소심함, 못생김, 늙음, 열정 없음' 의 단어들을 가진 무력한 모습의 시인, 그러나 '파란만장한 삶, 과격함, 잘생김, 젊음, 과다한 열정'을 지닌 청년.
처음에 시인은 청년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의 삶에 연민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청년이 지닌 그 '슬픔'이 부러웠고 필요했다. 천성이 착한(?) 시인은 자원봉사자 마냥 청년의 집에 갖가지 것들을 퍼다 나른다. 청년은 시인의 동정이 싫었다. 그러나 그의 착함과 관심, 특히 자기와 통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기대게 된다.
둘은 제주의 원천, 자연의 힘 그 자체인 '곶자왈'을 걸었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죽음'이라는 단어로 함께 시를 완성한다. 그들이 처음 무언가 '통함'을 느꼈던 순간이다. 그들은 '이상'을 꿈꾼다. 시인은 진짜 감동을 주는 '시'를, 청년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기만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시인의 아내와 청년의 어머니
'현실'이 막막한 이들
그녀들은 참 닮았다. 거침없는 욕과 직설적인 화법. 당장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이 급한 이들.
시인의 아내는 남편을 사랑한다. 비아냥거리면서도 살뜰하게 챙겨준다. 그녀가 그에게 원하는 건 단지 자신의 옆에서 자신이 하자는 대로 해주는 것, 먹고 사는 건 어느 정도 해결했으니 아이가 갖고 싶어졌다.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자신이 다 챙겨주는데 자꾸 엇나가는 것 같은 남편이 답답하고 이해가 안된다.
청년의 어머니는 속물적이다. 산 송장처럼 누워있는 남편 옆에서 아줌마들과 함께 신나게 화투를 치고, 아들에겐 쌍욕을 한다.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활짝 웃으며 돈부터 세는 그런 여자이다.
시인의 아내와 청년의 엄마는 생존하기 위해 처절함과 품위 없음, 그리고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녀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상'도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랑과 이상의 반복
시인과 청년 사이의 감정이 고조되는 시점이 바로 '수영장 씬'이다.
고즈넉한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수영장에 걸터 앉아 둘은 이야기를 나눈다. 청년이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을 꺼냈다. 쥐약을 잘못 먹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버지는 큰 돈을 들여 산(어머니가 알았으면 노발대발 했을) 장난감을 아들에게 건넸다. 그 때 청년은 이불 속에서 방귀를 뽕하고 뀌었는데, 아버지가 쥐약 방귀라고 놀려대며 킥킥거렸던 기억... 그 짧은 기억이 청년에게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랑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건 억만금을 준다해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청년의 아버지는 언젠가 집에 찾아온 시인에게 말했다. 내가 죽어야만 아들이 산다고. 병든 몸으로 청년의 이상을 가로막는 처참한 현실이 되어버린 아버지는 죽고 싶어 했다. 그가 죽어야만 아들이, 또 아들의 꿈이 살아날 것이기에. 평생 돈보다는 자신의 이상을, 행복을 추구했을 아버지에게 누워서 옴짝달싹 못하는 지금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픈 뒤로 청년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또 '사랑'도 없었다. 막막한 현실만이 존재하던 세상에 또 다른 아버지인 '시인'이 나타난 것이다.
한편 인공 수정 시술날, 병원에 가서 억지로 정액을 채취해야 했던 시인은 독방에서 '청년'을 떠올리며 사정한다. 평소 움직임이 둔했던 그의 정자들은 그날따라 아주 활기찼고, 결국 시술이 성공하여 아내는 임신을 하게 된다. 시인의 아이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그와 아내의 DNA를 받은 아이겠지만, 청년을 향한 사랑의 산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두 남자의 신체적 접촉은 별 다를 게 없었다. '플라토닉 러브'지만 사실 둘에게도 신체적·감정적 절정이 있었다. 바로 카페에서의 몸싸움 장면이다.
아내가 남편의 이상한 사랑에 대해 알게 된 후, 서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인과 청년. 시인은 참지 못하고 친구들와 함께 카페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청년을 찾아간다. 친구들의 이상한 시선에도 용감하게 청년에게 자기와 함께 가자고 이야기하는 그를 청년은 밀쳐낸다. 친구들이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된 시인의 용기에 청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한 대 친다. 둘은 서로 뒤엉켜 한바탕 몸싸움을 벌인다. 누워있는 시인의 몸 위에 올라타 그의 멱살을 잡은 청년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으며 뛰쳐나간다.
두 남자의 격렬한 몸싸움은 성행위를 연상케한다. 동성애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알몸의 두 남자가 뒤엉켜 몸싸움하는 사진들을 참고하여 다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영화 속 장면을 보자마자 이 이미지들이 떠오른 걸 보면 아마도 제작 시 베이컨의 작품을 참고하지 않았나 싶다.
여느 남녀 커플 이상으로 격렬했던 둘의 정사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애달프다. 청년은 시인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에게 손을 내민 시인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둘의 사랑은 잠깐 불어오는 춘풍처럼 찰나같이 지나갔다. 단지 그건 의미없는 해프닝이었을까?
시인은 청년으로부터 시의 재료가 되는 결핍과 슬픔, 사랑, 시 그 자체를 얻었다. 시 낭송 모임의 여자 회원은 그에게 말한다. 꽃향기만 표현하다가 그 이면을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청년은 돈을 얻었다. 시인은 그가 서울로 상경하여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청년에겐 지금 이 현실을 떠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돈이다.
청년은 말한다. 아이가 생겼다잖아요. 그래서 떠난 거라고. 아기의 또 다른 아비인 청년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아기를 남기고 떠났다. 청년은 떠나고 시인은 피지 않았던 담배를 피운다.
아기는 청년의 분신. 청년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 시인의 새로운 이상이 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아기는 먼 훗날 처참한 현실이 되어버릴 수 있는(청년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이상을 대신 실현시켜줄 수 있는 '희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인은 시를 쓰다 똥을 싼 아기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그의 멱살을 쥐고 흘렸던 청년의 눈물과 일치한다.
먼 옛날
청년과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그렇게 함부로 아름다운 것',
'온전한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하며,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그러한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슬픔이 말라갈 때쯤, 또 어떠한 계기로 다시 '사랑과 슬픔'이 찾아와 그를 살아있게 한다면 시인은 시를 쓰고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겠지. ( http://tv.kakao.com/v/376601152)
시인과 아들, 또 그의 아들... 그들을 살아있게 하는 사랑과 이상과 시는 계속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