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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상택 Oct 20. 2017

161. 혼자 보단 둘, 둘 보다는 셋

2017년 9월 27~10월 3일, 여행 371~377일, 페루 와라즈

트루히요를 떠나 출발한 곳은 페루의 중부 고산지대인 와라즈였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간 계산이 잘못되어 만나야 할 시점이 내 예상보다 하루가 더 길어졌기에 나 혼자 보내야 할 시간이 꽤 길었다.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야 할지 큰 계획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들이 기다려질 거라고 생각했다. 혼자 하는 여행도 즐겁지만 분명 혼자 보단 둘이, 둘보다는 셋이 더 나을 거니까. 그렇게 예상치 못하게 근 1주일 가까이 보내야 했던 와라즈에서의 생활상을 소개하려 한다.


고산 적응 훈련

와라즈는 해발 3,100m 정도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콜롬비아의 보고타와 에콰도르의 키토도 해발 2,500m에 육박하는 고도였지만 3,000m가 넘는 곳의 숙소 생활을 하는 것은 네팔 이후로 처음이었다. 다행히 도시 내에서 고도에 대한 이상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 앞에서 나름 세계 여행자로 고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먼저 고산 적응 훈련을 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선택한 곳은 와라즈에서 돈 들이지 않고 올라가 볼 수 있는 빌카화인(Wilkahuain)이라는 곳이었다. 엄밀히는 과거 유적지가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마을이 자리 잡은 조용한 산책로 같은 곳이었다. 전망대가 있는 언덕은 해발 고도가 3,600m 정도로 고도를 살짝 높여 훈련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아무래도 큰 볼거리는 없는 코스다 보니 추석 연휴를 앞둔 시점이었음에도 그 어떤 한국인도 없었고, 원래 한적한 곳에서 트래킹 하기 좋아하는 외국인들도 딱 한 팀 보았을 정도로 조용한 코스였다. 주변 풍경은 그야말로 시골. 아마 내가 다닌, 그리고 앞으로 다닐 페루에서의 풍경 중 가장 자연스러운 풍경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코스의 중반쯤 갔을 때 즈음 준비해 갔던 과일과 물을 마시는데 와라즈의 전경이 보이는 파노라마도 예술이었다. 하지만 풍경을 여유롭게 즐길 틈도 없이 구름 떼가 몰려오고 있어서 서둘러 가야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빌카화인 유적지가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큰 볼거리는 없었다. 잠깐 머무른 뒤 재촉해서 전망대로 향했다. 산 중턱 3,600m에 위치한 십자가가 있던 곳이 전망대였는데, 기가 막히게도 내가 전망대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순간 우박이 오기 시작했다. 고산지대의 날씨는 원래 예측이 어렵다지만 우박이라니. 다급히 산을 내려오던 중간에 고마운 도움의 히치하이킹으로 트럭을 타고 내려올 수 있었다. 야속하게 내려오니까 날씨가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젖었던 옷이 말라버릴 정도로. 그렇게 첫 적응 훈련이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 적응 훈련지는 파스토 루리 빙하였다. 해발 5,000m에 위치해 있는 빙하를 향해 가는 투어. 개인적으로 갈 수는 없는 곳이기에 투어상품을 이용하기로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많은 한국인(이라고 해도 네 명이었지만)과 함께 하게 되었다. 해발고도 4,000m부터 빙하가 위치해 있는 입구인 4,800m까지 차를 이용해서 움직이는데, 그 풍경이 장관이다. 중간에 유황천이 샘솟는 작은 호수에도 지나가는데, 물이 투명해서 밑의 지형이 살포시 보이기도 해 신기한 풍경을 자아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이상한 나무도 지나고... 하지만 본격적인 빙하 트래킹은 바로 입구인 4,800m부터였다. 꼴랑 200m의 고도 상승이고, 거리는 4km도 채 안 되는 평탄한 코스였음에도, 내 여행 최초의 최고 고도여서인지 첫 적응 훈련 때와 다르게 한 걸음 한 걸음이 꽤나 무거웠다. 같이 간 한국인들이 나를 제외하곤 모두 여자여서 무의식적인 센 척(!?) 덕분에 큰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약간의 어지러움과 몸이 무거워지는 묘한 현상을 경험했다. 손끝과 발끝도 저리는... 고산증세가 이런 거구나 라는 것을 처음 느낀 셈. 다행히 중반부쯤 갔을 때 증상은 사라져서 그 고도에서 가볍게 뛰는 것 정도는 아무 이상 없을 정도로 쌩쌩해졌다. 그렇게 고생해서 도착한 빙하는 의외로 덤덤한 풍경이었다. 나에게 첫 빙하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 날씨가 좋지 않아 그런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게다가 정상에선 우박이 나를 또 반겼기에 우비까지 입어야 해서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내려갈 즈음에 날씨가 좋아져 마지막에 사진을 팡팡 찍어댔다. 고산 적응 기념으로 5,000m 정상에서 맥주도 몇 모금 마셨는데, 고산에선 음주는 절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고장 몇 모금에 훅훅 들어오는 술기운이 무서워짐을 느꼈으니까. 아무튼 두 번의 산행으로 무사히 적응을 마친 듯했다. 이제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만 남았을 뿐!


혼자 보단 둘, 둘 보다는 셋

9월 30일. 드디어 친구들이 오는 날이었다. 고등학교 같은 반을 같이 보낸 민우와 여훈이가 추석 연휴 휴가로 페루에 오는 일정에서 서로 맞추어 와라즈에서 함께 보기로 했던 것. 당초 이 계획이 처음 나왔을 때에는 와라즈에서 하루만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나는 다른 도시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날짜가 다가오며 생각한 것이, 힘들게 친구들이 낸 휴가고 만나는 것을 서로 만들어가는 건데 내가 친구들의 휴가에 조금 더 맞춰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와라즈에서 함께 69 호수 트래킹을 함께 하는 것으로 일정을 바꾸었다. 아무튼, 친구들이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왔다. 남미의 흔한 비행기 연착이지만 휴가로 온 친구들에겐 한 시가 아까웠을 터. 와라즈에 먼저 와서 적응 및 위치들을 파악했던 나기에 친구들을 데리고 그 작은 (?) 와라즈 마을을 소개를 해 주었다. 필요한 심 카드를 사느라 조금 기다리기는 했지만... 하지만 친구들은 고산 증세 때문에 오래 동안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69 호수 트래킹을 꼭 해야 했기에, 친구들을 일찍 취침시켰다. 사실 저녁에 다시 깨려 했지만 고산 증세 때문에 에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다시 일어나야 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호수 트래킹 때 먹을 음식들을 준비한 뒤 다시 잤다가 새벽에 일찍 깨어났다. 

문득 민우가 '저기 별이 많다'라는 말에 하늘을 봤는데, 달이 거의 차가는데도 많이 뒤로 가서인지 쏟아질듯한 별이 보였다. 이것은 내가 페루 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별이었고, 이후로는 만월 내지는 기상악화로 별을 볼 수 없었다. 

아무튼, 새벽녘에 출발한 69 호수 산행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전 날씨가 굉장히 추웠던 터라 두툼한 옷을 입고 갔는데, 생각보다 많이 더웠다. 망할 고산지대는 이래서 날씨 예측이 어렵다. 69 호수는 말 그대로 페루에 존재하는 호수 중 69번째 호수라서 붙여진 별명이다. 엄연히 자기 이름이 있지만, 누구도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혼자 갔으면 꽤나 힘겨웠을 그 69번째 호수는 친구들과 함께여서 인지, 아니면 적응훈련을 잘 해서 인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조금 아쉽다면, 같이 산행했던 여행자의 페이스를 맞춰주기 위해서 민우와 여훈이와는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는 것. 고생 끝에 69 호수가 위치한 산 정상에 올라갈 수 있었고, 한참이나 올라간 거리에 비해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준비했던 점심인 식어버린 햄버거를 먹으며 보는 경치는 산뜻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 풍경 인 듯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친구들이 함께여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우꾼과 여행했을 때 녀석이 주로 하던 말이 있었다. '이런 좋은 풍경 혼자 봐서 죄송하다'며. 죄송한 수준까지는 몰라도 친한 사람들과 좋은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인 듯하다. 민우와 여훈이, 나까지 셋이서 함께 할 수 있던 그 풍경은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겠지.  


와라즈, 파키스탄이 떠올리게 하는

휴가로 바쁜 여행을 하는 친구들과 내가 일정을 온전히 같이하기에는 다소간의 무리가 있었다. 오랜 여행으로 폭발적으로 몰아치는 스케줄을 감당하기도 어려웠던 나였기에, 친구들은 와라즈에서 바로 쿠스코로 가는 일정을 강행해야 했고 나는 와라즈에 조금 더 남기로 했다. 리마에서 다시 볼 수 있다면 보자는 어렴풋한 약속을 남긴 채. 그렇게 혼자 와라즈에 남았다. 

그 높은 고도에 있는 마을은 나에게 있어서 어느 한 곳을 떠올리게 했다. 파키스탄 훈자. 사실 고산 적응 훈련에도, 69 호수에도, 왠지 모르게 파키스탄 생각이 많이 나서 친구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했는데 친구들은 '그럴 거면 왜 여기 왔냐'며 핀잔을 주었다. 휴가를 망친 듯한 내 말이 미안도 하지만, 그래도 생각나는걸 어떻게 해. 여행이 1년, 내 예상보다 길어졌다. 물론 바라던 곳인 남미까지 왔음에도, 지난 여행을 돌이켜 보게 된다. 묘하도록 오버랩되는 훈자의 풍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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