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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훈 Apr 19. 2020

나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몇 주 간 고민이 많았다. N번방 사건이 나와 완전히 동떨어진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N번방은 갑작스레 발생한 엽기적인 사건이 아니다. ‘야동’을 경험하고 묵인하며 소비해 온 남성들이 만든 세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나는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야동을 용인하고 묵인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일조한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자들 무리에서는 엄청난 양의 야동을 외장하드에 보유하고 있는 인간들이 꼭 한 명씩 있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의 별명은 (포)르노 사장이었다. 우리는 인터넷의 성장과 함께 자란 세대였다.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은 2003년, 그러니까 가정용 PC의 보급이 보편화되었고 인터넷의 최대 호황기이자 야동이 폭발적으로 소비되고 생산된 시기였다. “이 새끼 야동 진짜 많이 갖고 있대. 딸딸이를 하루에 다섯 번이나 친대.” 우리 남자애들끼리는 그의 동영상 보유량에 놀라며 그걸 그냥 그렇게 웃어넘겼다.

2005년 고3,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던 또 다른 동창 중 하나는 여자 기숙사를 불법 촬영했다.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디지털카메라의 동영상과 줌 기능을 활용한 것이었다. 다 먹은 치킨 박스에 카메라를 숨겨 공용 화장실을 찍기도 했었다. 어쩌다 그 애가 동영상을 찍은 사실이 친구들 사이에 발각되었지만 그 당시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비교적 평범한 애였고 공부도 곧잘 했다. 지금 같았으면 경찰에 신고를 했겠지만 그때는 그냥 미친놈, 찌질한 새끼 정도로만 취급했다. 그는 현재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2006년쯤에 나의 동창 중 하나는 P2P 사이트에 야동을 올리고, 내려받을 때마다 사용자가 내는 돈을 통해 수익을 올렸다. 공유한 야동이 몇 백 기가바이트에 가깝다고 했다. 그 애가 법망에 적발되었을 때, 가벼운 훈방과 함께 벌금을 내고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도 현재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는 고담 시티 출신이 아니다. 한 도시에서 서울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학교, 비평준화 고교 출신으로 시험을 쳐서 입학해야 하는 도내 서열 1위를 다투는 학교였다. 평범한 낯을 한 남성들이 아무 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곳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동영상을 자위의 주된 도구로 삼는 한국 남성 자위 문화는 잘못 꿰어진 첫 단추다. 야동의 일상적 소비는 곧 유통과 제작 구조를 구축했다. 하루가 머다 하고 불법 영상이 제작 유포됐다. 법은 그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고 잠깐 끓었다 이내 식었다. 이 범죄를 묵인하고 야동을 소비해 온 사람들이 박사방 안에 들어가기 위해 돈을 내고, 착취에 가담한 사람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없다. 평범한 남성들이 좆잡고 시시덕거리는 사이 세상은 좆되고 있었다.

한국 남성 자위의 역사는 한국 여성에 대한 일상적 착취의 역사가 됐다. N번 방 사건은 야동을 보며 자위를 하고, 불법 촬영을 하며, 야동을 서로 공유하는 것을 남자들끼리 웃어넘겨 오며 만든 사건이다. 일련의 행위들은 대다수의 남성의 일상에 녹아들어 있어서 범죄이자 착취인 줄 사리분별을 못하는 지경이다. 그리하여 나는 남혐에 대해 대꾸할 말이 없고, 26만 명과 몇 천명을 정확히 저울질할 수 없다. N번방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능사가 아니다. 우리 남성 모두는 무관하지 않다. 남성의 성생활은 누군가를 희생양 삼지 않아도 가능해야 한다.


위의 글을 온전히  써두고  주동안 혼자 갖고 있었다.  정도 얘기를 못하면 무슨 말을 털어놓을  있겠냐며... 다른 글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신중히 말을 고른다고 골랐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적극적 발언이 어렵다면 납작 엎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애먼 소리를  거라면 닥치는 것도 미덕일  있다. 하지만 침묵이  이외에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평범한 한국 남성의 경험을 털어놓음으로써 착취의 구조에 기여한 책임을 인정하고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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