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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훈 Mar 20. 2020

생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렇게 끌어안고 사는 것들도 있다

오늘은 정리를 했다. 베란다가 타깃이었다. 화분을 정리하고 싶었다. 번거로웠다. 살아있는 것이 늘 그렇듯 식물도 흔적을 남긴다. 새 잎을 내고, 오래된 잎을 떨군다. 흠뻑 물을 주면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뱉는다. 바닥에 물 자욱을 남긴다. 나는 그것을 닦는다. 그 흔적을 수습하는 일은 번거로웠다.

겨울의 식물 돌보기 또한 다소 막막했다. 보통의 식물을 키울 때 흙이 마르거나 잎이 쳐지면 물을 흠뻑 주는 게 원칙이다. 잎을 많이 떨군 상태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했다. 뜸하게 주긴 했지만 물을 소화나 시키는 건지 궁금했다. 흙이 잘 마르지 않다 보니 종종 그들의 존재를 잊었고 자주 돌봐주지 못했다. 대체적으로는 모두 생기를 잃고 죽은 듯이 보였다.

추위에 충분히 노출되지 않아 월동에 실패한 블루베리를 먼저 보내줬다. 전부 뽑아서 앞마당에 버려둘 심산이었다. 겨우내 가지만 덩그러니 있던 무화과 화분을 비우려던 찰나, 마른 가지에서 새 잎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화분을 내려놨다. 옆에 있는 마오리 소포라도 비우려고 들여다봤더니 새 잎이 옹기종기 움츠려 나고 있었다. 겉과 위쪽 잎이 마른 프린지드 라벤더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래쪽부터 새 잎이 올라온다.

생이 움트고 있다. 겨울을 버텼다. 잎을 떨구고 움츠려서 쉼 없이 자기 일을 했다. 그 속도가 더뎠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사람뿐이다. 움츠렸다가 의지를 뻗치고, 살겠다고 잎을 펼치는 걸 보니 대리만족을 느낀다. 내가 못하는 것을 너무 작은 존재들이 쉽게 해낼 때 경이롭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도 지금은 잠깐 움츠러들 뿐이라고, 그렇게 자기 일을 하다 보면 곧 생이 올 거라고.

화분을 볕과 바람이 드는 곳에 옮겨 두었다. 밀렸던 사랑을 담아 물을 흠뻑 준다. 밑으로 물이 주르륵 흘러나온다. 생의 의지와 흔적을 보니 자연도 인간이 남기는 흔적이 버거웠겠다. 인간은 움츠려 본 적 있는가. 인간의 흔적을 수습하는 건 누구의 몫인가. 흔적으로 자연을 망치면서 자연의 존재에 위로받는 나는 뭐하는 놈인가. 자연은 인간이 얼마나 번거로울까. 여러 잡생각을 하는 와중 화분은 제자리를 잡았고 정리는 실패로 돌아갔다. 살아있는 것을 보낼 수는 없다. 흔적을 수습하는 것도 내 몫이다. 이렇게 끌어안고 사는 것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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