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에서 당신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미루기
'미루기' 그리고 '천재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단어의 조합이 서점에서 책을 둘러 보던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미루기'
사전적 의미로 '미루기'는 지연행동(遲延行動)을 뜻한다. 즉, 해야 할 일을 불필요하게 미루는 것을 말한다. 이는 주로 더 즐거운 일을 덜 즐거운 일보다 먼저 하거나 덜 중요한 일을 더 중요한 일보다 먼저 하는 습관에 의해 나타나며, 이렇게 미뤄진 일은 미래에 더 급한 일이 된다. 종종 '미루기'는 최종 기한 직전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럼, '천재'라는 말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이 또한 사전적 의미로만 본다면, '보통 사람에 비하여 극히 뛰어난 정신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진 사람으로 창의성과 생산성이 뛰어난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렇다.
두 단어 모두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느낌 그대로다.
서점에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도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 두 단어는 어울릴 법 하지 않은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구입해서 읽기로 했다. 그렇게 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책의 부제 때문이었다.
이 책, '미루기의 천재들'의 부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에서 당신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미루기의 역사'
천재들은 완벽한 인간이라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루기'라는 습관은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인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일을 잘 미룬다.
무엇인가 마음 먹고 하려 하지만,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해야 할 일을 곧잘 미룬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모습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재'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인식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찰스 다윈.
우리는 이들이 인류 역사에 어떤 업적을 남긴 인물들인지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분명히 '천재'들이다. 그런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들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이 '미루기의 천재들'이란다. 그리고 부제는 말한다. 그런 천재들이 당신과 나'도 가지고 있는 같은 모습의 '미루기'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천재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
내 모습에서 천재들의 모습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기대.
이 책이 나를 이끈 이유였다.
찰스 다윈.
그 유명한 '종의 기원'을 쓴 저자이다.
인류 역사에서 생명현상을 관찰하고 '모든 종은 변화한다'라는 세 어절로 된 단순하지만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문장(p15)을 통해 '진화'라는 개념을 체계적으로 알린 최초의 인간이다. 다만,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5년 여에 걸친 세계일주 중에서 남미의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관찰한 놀라운 생태적 현상에 대해 그는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에 세상에 알렸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의 기원'이다.
그는 왜 세상을 바꾸고 그동안의 종교적 신념을 일순간에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중요한 발견을 세상에 내 놓기 위해 20년을 미뤘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그리고 그의 유명한 노트에 담긴 내용들까지..
미학, 해부학, 천문학, 공학을 넘나드는 그의 천재성.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천재성을 가진 인물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사람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 '미루기의 천재들'의 저자가 이야기 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런 천재이면서 동시에 '미루기의 천재'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약속을 했다가 낙심하고 미루기를 반복하는 게 기본 장업 방식이었던 사람이다. (p109)
처음으로 다빈치의 전기를 썼던 조르조 바사리 조차, "레오나르도는 많은 일을 벌였지만 자신이 상상한 것을 제대로 구현할 완벽한 기술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며 완벽주의적 성향이 문제라는 지적을 했다고 한다. 교황 레오 10세 또한, "이 사람은 그 무엇도 끝내지 못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다빈치가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하는 것에 크게 실망하곤 했다고 한다.
미루기 천재다.
적어도 이 사실로만 본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일을 미루는 '미루기의 천재들'이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일을 미루는 걸까? 일을 미루는데 어떤 심리적 상황이 연결되어 있는 걸까? 내가 일을 미룰 때 나는 무슨 이유로, 어떤 심리적 상태에서 일을 미루게 되는 것을 까?
이 책, '미루기의 천재들'은 그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미루는
첫 번째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실패했을 때, 자기만의 변명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기 때문에, 일부러 열심히 잘려 들지 않고 미루게 됨으로서 그 일을 해 내지 못한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미루기'에 대하여 연구한 페라리는 이렇게 말했다.
"미루기는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p55)
두 번째 이유는 수치심의 방패로 사용하는 것. 스스로에 대한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두려워 일을 미루게 되는 완벽주의적 성향. 자신이 해낸 일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 하는 성향.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의뢰인 또는 상사가 정해 놓은 마감일에 대한 반감때문 등등..(p61)
세 번째 이유는 그 일을 해 내기 위한 충분한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내면에서 그 일을 해 내기 위한 자신만의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해 내기 위해 '적절한 기분 상태'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가장 적합한 상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때를 위해 미루는 것이라는 얘기다. (p58 ~ 59)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은 위에서 언급한 이유 중 어떤 이유로 자신들의 일을 미뤘을까? 그리고 나는 일을 미룰 때, 위에서 언급한 이유 중 어떤 이유로 내 일을 미루는가?
어떤 특정 이유 하나가 작동할 수도 있고,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왠지 다윈과 다빈치는 세 번째 이유일 것 같고, 나 같은 일반 사람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 때문일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천재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작동하는 순간이다.
아니다.
다윈도 다빈치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로 일을 미뤘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세 번째 이유로 일을 미뤄왔던 것이 분명하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찰스 다윈도, 그리고 당신과 나도 모두 그럴 수 있다.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이 책, '미루기의 천재들'에서는 미루기라는 습관적 성향을 어떻게 풀어 나갈까?
이 책 후반부에 나오는 몇가지 소제목을 소개해 보려 한다.
이 소제목들은 '미루기의 천재들'이 '미루기'라는 다소 냉소적 의미의 이 단어와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싶었는지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미루기'라는 단어를 어쩌면 전혀 어울릴 법 하지 않은 '천재들'이라는 단어와 조합을 이루게 한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성격유형을 분석하는 용어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임박착수형'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그 일에 대한 마감일이 임박해서야 비로서 일을 착수하고 실행하는 성향의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내가 성격 유형 분석에 대한 강사 자격 공부를 할 때 배운 내용으로 말하면, '임박착수형'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향을 갖는다.
이 성향의 사람들은 마감일까지 실제 일하는 행위를 미룬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혹시 그 일이 상사에 의해 지시된 회사일이라면 일을 시킨 상사의 눈에는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중간 점검을 위해 상사가 이렇게 묻는다.
"OO씨, 그 일 어떻게 되 가고 있나요?"
그럼 이 성향의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공산이 크다.
"아! 네, 그 일요. 그거 아직요!"
그럼 일을 시킨 상사는 어떻게 생각할까? 특히 그 상사가 '조기착수형'이라면 어떨까?
하지만 성격유형 분석에서는 이런 성향의 사람들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마감일이 다가올 때까지 어떻게 이 일을 진행할지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기획 조차도 머리 속으로 한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정리하기 위해 노트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려고 하면 또 다른 아이디어가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자료를 찾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실제 일은 진행되지 않고 지연되는 것처럼 미뤄진다.
그러나 마감날이 가까워 지거나 마감날이 코앞에 오면, '임박착수형'인 사람들은 그 동안 찾아 왔던 자료들과 자신의 머리 속에 쌓아 두었던 아이디어들을 토대로 마감시간까지 그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일을 진행하여 마무리 한다.
물론 모든 경우에서 일을 마무리하냐고 묻지 않았으면 한다. 때로는 마감일 보다 좀 늦게 끝내기도 하니 말이다.
또 그 일이 완벽하냐고도 묻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에 완벽하게 끝내는 일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부터 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루기'는'상황이 더욱 악화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을 지연하는 것이다.(p31)
'미루다'라는 단어의 가장 엄격한 정의에 따르면, 일을 미루는 사람은 미루기 행동이 훗날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알면서도 일을 미루기로 선택한 사람이다.(p112)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루기'라는 단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느낄 수 없는가? 그래서 '천재'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나의 '미루기' 습관은 어쩌면 나의 '천재성'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미루기, 특히 아이들의 미루기 행동을 그들의 천재성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카페에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앞에는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산만함으로 가득찬 아들, 수학 문제 한 개 푸는데 집중하기 무척이나 어려워(?) 해서 자꾸 다른 행동으로 자신의 수학 문제 푸는 것을 미루고 있는 아들이 있다. 그러면서 과학상자나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드는 아들의 모습이 교차되어 떠오른다.
수학 문제 푸는 것은 어떻게든 미루려고 하는 아들. 하지만 로봇 만드는 시간에는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집중력을 발휘하여 멋진 로봇을 만들어 내는 아들. 그런 아들을 보면서 '미루기'의 두 가지 면을 보게 된다.
이 책, '미루기의 천재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으로부터 당신과 나까지 바로 이 '미루기'의 두 가지 면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당신도 '미루기의 천재들'을 통해 당신의 주변에서 그것을 찾아 느낄 수 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