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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로의 모험

밤과 낮이 번갈아 펼치는 마법들

by 여름햇살

너머로의 모험


오늘은 조금 먼 길을 가야 한다. 딱 좋은 온도로 달구어진 햇살의 마중을 받으며 이제 제법 익숙해진 아침거리를 부지런히 걷다 보니 어느새 눈에 익은 풍경들이 모두 등 뒤로 멀어졌다. 복닥거리는 중심가를 벗어나면, 그 너머에 펼쳐진 큼직한 길들은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없이 맨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겐 그다지 친절하지 않지만, 그래서 비로소 새로운 어딘가로 모험을 떠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도시의 아침


이 작은 모험의 목적지는 ‘예술가마을’이라고 불리는 ‘반캉왓Baan Kang Wat’인데, 치앙마이 올드타운에서 제법 떨어진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머물고 있는 올드타운 북쪽의 창푸악에서 반캉왓까지 도보로 가려면 걸리는 시간은 무려 한 시간. 여행객들은 당연히 ‘택시’를 선택하는 거리고, 현지인들은 더더욱,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웬만해선 걸어다니지 않는 길이겠지만, 그래서 마음이 더 들뜬다.


아기자기한 동네길을 걸으며 그 속에 오밀조밀 숨겨진 보물상자들을 찾아내는 것도 큰 즐거움이지만,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풍경 속에서 저 먼 앞까지 뻥 뚫려있는 너른 도로의 가장자리를 걸어가다 보면,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위를 깡총깡총 건너가는 것 같아 색다른 설렘이 인다.


도로변에서 만난 과일트럭


온갖 차들이 씽씽- 소리를 내며 연신 곁을 지나칠 때마다 덮쳐오는 매연과 흙먼지는 이 멋진 하이킹의 치명적인 흠이지만, 도로변에 오아시스처럼 느긋하게 세워져있는 과일트럭과 마주한 순간엔 그 아쉬운 단점마저 새로이 발견한 보물상자를 둘러싼 신비로운 아지랑이가 된다. 한국에서 교외의 한적한 도로를 주행하다 보면 심심찮게 과일노점상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중심가를 벗어난 치앙마이 도로변의 풍경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처음엔 자연스레 낯설고도 다른 풍경들에 먼저 시선이 가지만, 그 속에서 가끔씩 이렇게 닮은 풍경들을 발견할 때면, 그건 다름보다 더 값진 경험으로 다가오곤 한다. 다른 날씨가 만들어낸 확연하게 다른 풍경들 속에서도, 인간의 삶은 그렇게 다른 듯 닮은 모습으로, 저 거대한 물 흐르듯 이어지나 보다.


오동통한 몸에 짙은 줄무늬를 새긴 수박들은 겉보기엔 다들 아주 점잖아 보이지만, 여 봐란 듯 반을 뚝 갈라 진열해 둔 녀석들을 보니 그 속은 태양이 시샘할 정도로 새빨갛게 익었다. 가격은 아마도 1kg에 20바트인가 본데, 귀갓길이라면 덥석 한 통 사서 품에 안고 돌아갔겠지만, 이제 막 오늘의 길을 나선 참이니 아쉬운 대로 트럭 뒤편에 자리한 노점을 둘러본다.


다 같은 줄무늬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 다른


어쩜, 실해 보이는 과일을 진열해 둔 노점들은 하나 같이 주인장이 자리를 비워 애를 태우는 것까지 한국의 풍경과 꼭 같은지! 트럭은 매연과 싸워가며 도로변에서 호객에 열심인데, 노점엔 통통한 수박들만 한껏 여문 자태를 뽐내며 가지런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장은 감감무소식이다.


햇살의 투명한 마법 속에


널찍한 도로의 가장자리를 걷다 보면 이따금 나타나는 샛길들. 어느 집 담장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여름꽃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주황색 꽃잎도, 그 속에 숨어있는 노란색 수술도, 멀리서도 거침없이 시선을 잡아끄는 또렷한 빛깔들도, 모두 종이로 접어서 뚝딱 만들어낸 것만 같은 모습. 내가 가야 할 길은 저 앞에 끝없이 펼쳐진 직선이지만, 잠시 경로를 이탈해 짤막한 꽃길을 걸어본다.


인간이 심어둔 철조망과 구부러진 식물의 덩굴손이 서로 제법 닮았다


꽃들은 알까. 잠시 곁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꽃잎과 꼭 같은 빛깔로 물들어버린 것을. 인생의 대부분은 매캐한 연기에 휩싸인 저 아스팔트 위를 걷는 시간들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속에서 이따금 맞닥뜨리는 이렇듯 화사한 꽃길들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길고도 험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나 보다.


부지런히 걷다 마주친 또 다른 꽃. 꼭 다문 연둣빛 봉오리는 꼭 육즙이 가득 찬 만두 같은데, 하이얗게 활짝 피어난 모습은 5월의 신부처럼 화사하기 그지없다. 따로 솜씨 부려 꺾지 않아도, 자연스레 피어있는 그 모습 그대로가 정성을 가득 들여 엮어낸 자그마한 부케 같다.


혹시 메리포핀스 부인의 우산인가요?


조금 더 걸어간 곳엔, 사연을 알 수 없는 비닐우산 하나가 덩그러니 떨어져 있다. 한낮의 햇살이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땅 위로 내려앉다가, 예기치 않게 우산 가장자리에 달려있는 초록색 장식들에 부딪쳐 화들짝 놀라곤 이내 반짝반짝 부서진다.


비 오는 날보다 햇빛이 쨍쨍한 날 더욱 그 존재가 빛나는 우산. 누군가 비가 그친 뒤 말리려고 내놓았다가 바람에 날아가는 바람에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머글들은 알지 못하는 마법을 담아서, 어느 마법사가 일부러 길가에 놓아둔 것인지. 우산 위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여름햇살은, 어쩌면 초록우산에게 남몰래 따끈따끈한 주문을 걸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밤이 되면 누군가 그 우산을 손에 들고서, 훨훨 저 까만 밤을 날아갈 수 있도록.


느닷없이 나타난 우산 하나에 모락모락 피어나던 상상들이, 자그마한 물가에 닿아 태평하게 가라앉았다. 해질 무렵이 되면 저 네모난 의자에 동네사람들 하나둘씩 모여 앉아 하루간 쌓인 이야기꽃을 피우려나. 아니면, 이미 그 위에 투명한 아지랑이의 형상을 하고서 찾아온 신선들이 모여 앉아 두런두런 뜨거운 한낮의 햇살을 더 뜨겁게 달구며 담소를 나누는 중인 걸까.



한적한 동네어귀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지만. 오늘은 왜인지 인간세상 곳곳에 내려앉은 투명한 햇살들이 톡-톡- 자그마한 장난들을 치고 있는 것 같은 날이다. 불쑥 시선이 닿은 담장 위엔, 누군가 살포시 올려둔 열매가 두 개. 멀리서 얼핏 보았을 땐 ‘감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레몬처럼 꼭지가 톡 튀어나와 있다. 이 담장 위에선, 햇빛이 짜준 투명망토를 걸친 신선들이 나뭇가지에서 갓 떨구어낸 과실 두 개를 찻잔 삼아 그 달콤한 향기 마시며 작은 골목길의 천태만상을 유유자적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가 무성히 자라난 어느 집 앞 빈 터엔 까맣고 하얀 닭들이 실컷 뛰어노는 중. 여름 한낮의 햇살은 투명한 마법의 망토 같아서, 그 속에 평화로이 몸을 뉘인 평범한 일상의 풍경들이 어쩌면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들이 궁금해진다.


까만 닭, 하얀 닭, 그리고 까맣고 하얀 닭


익숙한 바탕을 딛고서


한적한 산촌마을 같은 풍경 속을 얼마간 더 걷다 보니 드문드문 눈앞에 세련된 상점들이 나타난다. 네모난 쇼윈도마다 공들여 만든 수공예품들을 보기 좋게 전시해 둔 것을 보니 반캉왓에 거의 다 왔나 보다. 분홍색 방울꽃들의 환영을 받으며, 일단 점심을 먹을 곳부터 찾아 나섰다.



때마침 눈앞에 나타난 ‘Restaurant’ 표지를 따라가 보니, 정원에 꽃나무를 예쁘게 심어둔 운치 있는 2층 주택이 어서 오라며 반겨준다. 평소엔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발견하면 구글지도를 켜서 평점과 메뉴부터 확인해 보는데, 첫눈에 사랑에 빠진 것처럼 오늘은 무작정 이 동화 같은 이층집이 마음에 들었다. 나무에 둘러싸인 돌계단을 총총총 뛰어올라 식당 안으로 돌진해 자리에 앉고 나니, 화덕에서 무언가를 굽는 냄새가 모락모락 다가와 코끝을 스친다. 목적지를 설정해 두고 오직 끝만 보며 걷는 도중엔 배가 고프단 것도 몰랐는데, 일단 멈추고 나니 더는 한 걸음도 걷지 못할 정도로 허기가 급격히 온몸을 점령해버렸다.


물부터 한 잔 벌컥벌컥 들이켜고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이런, 피자와 파스타를 파는 집이다. 쌀로 만든 리조또 메뉴 하나 정도는 있겠지 하고 메뉴를 샅샅이 살폈지만, 없다. 샐러드도 없다. 이럴 수가. 졸지에 물 한 잔 얻어 마신 나그네가 되어 다시 길을 떠났다. 정오의 햇살은 여전히 투명한 망토를 사방에 포근하게 펼치고서 그 속에 숨겨진 비밀들이 궁금하지 않냐고 속삭이는데, 허기짐을 깨달아버린 내 머릿속엔 오로지 ‘식당’ 생각뿐이다.


지도를 살펴보니 마침 바로 근처에 쏨땀을 파는 식당이 있어 허겁지겁 그리로 향했다. 태국음식들이 가득한 메뉴판을 보니 천국에 온 것 같다. 피자와 파스타는 너무도 잘 아는 음식들이지만 어쨌든 밀가루가 들어있어 먹을 수 없는데, 번역기를 통해 겨우 그 이름을 읽어낸 태국음식들은, 맛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 보인다!


자, 이제 오늘의 룰렛을 돌려볼 시간. 먼저 ‘태국식 백반’에 빠질 수 없는 쏨땀 한 그릇부터 주문하고, 마음이 가는 곳을 따라 새우를 넣은 쌀국수요리를 한 접시 더 주문했다.


허겁지겁 돌진한 오늘의 식탁


곧이어 식탁에 놓인 쏨땀에, 잔뜩 성이 나 아우성치던 식욕이 한결 차분해졌다. 이전엔 여행을 할 때면 으레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없는 특별한 맛’을 우선하곤 했는데, 세 달의 긴 여행을 하다 보니 오히려 ‘익숙한 일상의 맛’들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삶을 얼마나 튼튼하게 지탱해 주는지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한 젓가락 맛을 보니 역시나, 한국에서 늘 당당하게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김치처럼, 지나침이나 모자람 없이 새콤하고도 아삭하게 한 끼 식사에 훌륭한 바탕이 되어주는 바로 그 맛이다.



익숙한 것들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위한 든든한 바탕이 되는 법! 쏨땀이 오늘 식사의 바탕이 되어주리라 믿고 함께 주문한 요리는 큼직한 새우와 얇은 쌀국수를 태국식 양념에 버무린 것인데, 한국요리로 치자면 ‘비빔국수’에 가까운 것 같다. 양념은 눈에 보이는 색깔 그대로 매운맛이 나지는 않았고, 전반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기보단 슴슴한 편이었는데, 한국식 비빔국수에 익숙한 탓인지 처음엔 ‘어? 뭔가 좀 부족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식사를 다 마치고 나니 산뜻하게 한 끼 먹기에 딱 좋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느새 일상에 스며든 동경들


‘잘 아는 맛’과 ‘오늘 막 알게 된 맛’ 두 가지가 수북이 담긴 접시들을 모두 깨끗이 비워내고 식당 밖으로 나오니, 몇 걸음 걷지 않아 반캉왓이 나타났다. 허기짐이 두 눈을 가리고 있을 땐 바로 지척인 목적지가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졌는지!


반캉왓에서는 아주 특별한 하루를 보내려고 여행 전부터 벼르고 또 별렀는데, 조금 더 신중하게 식당을 고르지 않고 점심을 너무 후다닥 해치웠나 싶어 뒤늦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반캉왓 안에도 재미난 식당들이 많았다


‘빠이’와 더불어 ‘반캉왓’은 치앙마이를 ‘늙어서 살고 싶은 곳에 미리 가서 살아보기’ 프로젝트의 첫 여행지로 선택하는 데 망설임 없이 쐐기를 박아준 지역이기도 한데, 특히 여행을 계획했던 초반엔 ‘성탄절이 끼어있는 첫 일주일은 무조건 반캉왓에서 근사한 휴일을 보내야지!’하고 투지를 불태웠었다. 이후 세 달 동안 머물 지역들을 하나하나 고르다 보니 ‘휴일’에 대한 정의도 점차 바뀌어 결국엔 올드타운 남쪽의 조용하고 소박한 주거지 ‘하이야HaiYa’를 최종적으로 세달살이의 첫 문을 여는 ‘휴양지’로 고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캉왓’에 막연히 품었던 기대까지도 바뀐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의 내게 ‘반캉왓’이란, 젊은 예술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따끈하게 지펴낸 자유로운 창작의 열의가 아랫목처럼 포근하게 웅크린 초록의 요람 속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반짝이는 여름햇살로 온몸을 물들일 수 있는 상상 속의 낙원 같은 존재였는데, 치앙마이에서 어느덧 두 달을 훌쩍 보낸 뒤에야 마침내 ‘반캉왓’에 와보니, 저 먼 한국에서 막연한 꿈처럼 여기며 동경했던 ‘반캉왓의 특별한 휴일’은 그새 너무도 자연스레 내 매일의 일상에 스며들어있었다.


한때는 먼 꿈이었던, 반캉왓의 풍경들


뜨개, 염색, 가죽공예 등, 반캉왓엔 기대했던 대로 치앙마이만의 개성을 담은 아기자기한 예술작품들이 가득했지만, 왜인지 내 마음엔 좀처럼 여행을 떠나오기 전엔 가득했던 소유의 욕구가 끓어오르지 않는다. 대신에, 인간의 의지와 문명이 꽃피워낸 화려한 그 모든 것들을 담담히 지나친 시선은, 저 드넓은 대지로부터, 아득한 하늘로부터, 생과 함께 부여받은 본능대로 그저 자라나는 무성한 초록과, 그 틈바구니 속에서 태연히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자그마한 체온을 가진 생명들에 더욱 오래 멈추어 섰다.


그래도 디저트는 포기할 수 없어!


여행을 시작하기 전엔 사진만 보고도 어서 손에 넣고 싶은 열망이 들끓었던 멋진 수공예품들을 그저 한 번씩 눈에 담는 것만으로 덤덤히 지나칠 수 있는 건, 그것들을 잉태하고 탄생시킨 이 아름다운 초록의 요람을 그간 이미 충분히 마음에 담았기 때문은 아닐까. 고대했던 반캉왓에서의 하루는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버렸지만, 복잡한 도시에선 늘 분출 직전의 화산처럼 쉼 없이 들썩이던 소유와 소비에의 열망들이 결국엔 인간이 자연과 평온하게 관계 맺지 못하여 부서져버린 안정감의 파편들로부터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해주었다.


계획과는 달리 빈손으로 반캉왓을 떠나게 되었지만, ‘예술가마을’ 출신답게 색색의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는 ‘디저트’까지도 그냥 지나쳐버릴 수는 없지!


여름의 창문들


반캉왓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여겨봐 두었던 카페에서 차 한 잔과 곁들일 디저트 한 접시를 주문했다. 디저트는 쇼케이스 안에 진열된 것을 직접 보고 고르면 되는데, 밀가루와 우유가 든 것을 피하다 보니 남은 것은 앙금으로 만든 화과자뿐이었다. 여태까지 경험한 바로는, 한국과 그 이웃인 일본, 중국 그리고 조금 먼 태국까지, 앙금으로 만든 화과자들은 그 모양만큼은 누가 누가 더 창의적이고 손재주가 좋은지 내기라도 하듯 한없이 다양하지만, 그 맛은, 팥으로 만들었건 콩으로 만들었건 껍질을 벗겼건 말았건 간에,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다.


파란 문 앞의 티타임


하지만 주린 배를 모두 채운 후에 먹는 디저트란, 그 태생부터 이미 맛을 넘어선 다양한 감각들의 즐거움을 위한 것! 탐스러운 앙금꽃 두 송이를 두 눈으로 실컷 만끽하고 있으려니,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살랑살랑 넘나들며 곧 찾아올 저녁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햇살도 작열하던 정오의 위용을 한 꺼풀 누그러뜨리고, 기분 좋은 선선함 속에서 마주하는 앙금꽃엔 차가운 유리 너머에서 들여다보던 때보다 더 사랑스러운 생기가 넘친다. 섬세하게 빚어낸 구석구석까지 두 눈으로 먼저 모두 만끽한 후에야 마침내 입에 넣은 화과자는, 역시나 익히 알고 있던 바로 그 맛.


원래 아는 맛이 제일 무섭거든요


혀끝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달콤함은 이전에도 수없이 맛보았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창밖엔 오늘의 태양이 오로지 오늘만의 풍경들을 비추고, 그 속을 누비며 날아온 바람은 오직 오늘만의 습도와 온도를 다정하게 살갗에 전해준다. 그 속에서 살포시 한 귀퉁이 떼어 맛본 달콤함은, 변하지 않는 음정을 지닌 하나의 음표. 하지만 비록 어제와 같은 음이라 할지라도, 바람이, 햇살이, 자유로이 일렁이며 우연처럼 엮어낸 오늘의 오선지 속 선율은 어제와는 또 다른 모습이기에, 늘 같은 음정인 것만 같은 그 음표 하나도, 그 속에서 어제와는 전혀 다른 음악이 된다.


밤이 펼치는 신비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나면, 빛으로 물든 세상 속을 거닐 때와는 또 다른 모험이 시작된다. 기대했던 것들보다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에 더욱 끌려가는 하루. 은은하게 드리워진 밤의 장막은, 한낮의 태양이 펼치는 투명한 망토와는 또 다른 마법으로 온 세상을 색칠한다.


잿빛 커튼 너머로 떠오르는 달


꽃도 나무도 하늘도, 밤을 한 꺼풀 걸치고 나니, 낮에는 선명했던 그 모든 빛깔들이 현실의 경계를 스산히 지워내며 몽환의 신비로움에 물들었다.


밤의 색깔들


꿈결 속을 걷듯 밤의 풍경 속을 걷다 보니 시곗바늘이 훌쩍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금세 숙소 앞에 다다랐다. 집에 가서 요리를 하려고 마음먹고 냉장고에 무슨 재료들이 남아있는지 떠올려보는데, 앨리스를 훌쩍 이상한 나라로 데리고 간 시계를 든 토끼처럼 불쑥 눈앞에 검은 고양이가 나타났다.


고선생님, 흰 양말 야무지게 챙겨신고 이밤에 어디 가세요?


까만 밤빛으로 코트를 지어 입고 네 발엔 흰 양말을 야무지게 챙겨 신은 고양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터벅터벅 걷다 보니, 창푸악을 떠나기 전에 한 번쯤 가 봐야지 하고 찜해두었던 식당 앞이다. 짙은 밤에 잠긴 동네어귀에 호롱호롱 불을 밝힌 자그마한 식당엔 오늘 밤 잔치라도 벌어지는지 동네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앉아있다.


이런 떠들썩한 밤을 놓칠 수는 없지! 마침 가장 작은 테이블 하나가 비어있어 덥석 자리를 잡았다. 주문한 음식은 계란후라이 하나 얹은 바질오징어볶음 덮밥.



계란후라이는 지글지글 끓는 기름에 튀기듯이 부쳐내어 가장자리가 바삭바삭하고, 빨간 고추를 잔뜩 썰어 넣고 센 불에 볶아낸 바질오징어볶음은, 초록 야채들 사이에 꽃처럼 피어있는 빠알간 빛깔들만큼이나 화끈하게 매운맛이다! 옆 테이블에서 연신 신명 나게 웃고 떠드는 소리를 반찬으로 곁들이니, 정수리까지 얼얼해지는 매운맛이 한층 더 수다스러워지는 느낌. 다른 날 식당을 찾아 홀로 조용히 식사를 했다면, 아마도 그 매운맛은 오늘의 이 떠들썩한 화려함과는 사뭇 달랐을 것 같다.


잔칫상 귀퉁이에 말끔히 비워낸 접시 하나 살포시 보태어두고 식당 밖으로 나서니, 마침내 내 세상이 왔노라며 짤막한 골목길에 밤이 빈틈없이 암막을 쳤다. 아까는 저 멀리에서 아롱아롱 빛나는 호롱불을 쫓아 모험하는 기분으로 걸어온 길을, 이번엔 등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서두르며 걸었다. 새까만 상자 속에 갇힌 듯, 빛을 전부 잃은 길 위엔 내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는다.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마치 차원이라도 건너온 듯, 대로변 곳곳엔 아직 불빛이 환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즈넉한 일상의 풍경들을 한 번 둘러본 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환한 밤


방금 전엔 뭐가 그리 두려워 허겁지겁 도망치듯 걸었을까? 칠흑의 어둠에 휩싸인 그 자그마한 골목길 역시도, 이 태연한 일상의 풍경들 중 한 조각이었을 뿐인데. 그저 낮동안엔 찬란하게 빛나던 색들이 전부 이르게 까아만 잠자리에 든 것뿐인데.


밤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은, 이토록 간단하다. 밤낮이 번갈아 이 세상 위에 펼치는 그 모든 신비한 마법들은, 어쩌면 단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일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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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포스트는 하루 늦게 월요일에 발행되었습니다. 다음 주엔 다시 연재일인 일요일에 찾아뵐게요.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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