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쟁점과 논란이 달라진다
정비석 소설가는 《서울신문》에 「자유부인」이란 소설을 연재했다. 이 소설이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자유부인」은 남성들에게 억눌려 있던 여자들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사회활동을 활동을 한다. 이런 사회활동의 부작용으로 교수 부인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된다.
이 문제로 당시 신문에는 교수의 품위를 생각하지 않는 소설가라고 정비석을 비난하는 글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에 여러 곳에서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자 정비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비석은 『자유부인』에 대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일부 여성들의 그릇된 인식을 비판하고, "도덕적 결론을 위해” 소설을 썼다고 밝힌 바 있으나, 이것은 자신의 작품을 둘러싼 많은 논쟁들과 비판들을 겪은 이후 자신의 집필 의도를 나름 재구성한 측면이 반영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소설 연재 당시 정비석은 독자들의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로 인해 소설의 내용을 수정한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러한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 문학의 굴종까지는 아닐지라도, 사회의 요구에 따라 작품을 집필한 정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비석 소설에 드러난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인식과 변화 양상」, -「신박사와 이혼과 『자유부인』을 중심으로- 이윤정 · 한승우, 『우리文學硏究』, 73호, 우리문학회)
국회도서관에서 <자유부인>이란 영화를 보았다. 1956년에 상영된 영화다.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는 영화이다. 14만 명이 관람을 했다고 논문에 나온다.
지금 이 영화를 보니 당시에 이 영화가 왜 장안의 화제였는지, 당시의 여인들의 시대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가부장제에 억눌려 살면서 움츠려 들었던 여성들이 서양에서 밀려온 양풍(洋風)에 상점에는 최고급 물품을 파는 양품(洋品)점이 늘어났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본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당시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한복치마저고리를 입고, 함석으로 만든 다라이에 빨래를 하고, 석유곤로에서 요리를 했다. 나도 석유곤로를 많이 봤다. 석유곤로가 있기 전에는 숯불에서 요리를 했다. 숯불은 장작을 떼고 나면 아궁이에서 숯을 거두어 드렸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교수 부인인 오선영은 양품점에 취직을 하면서 일탈이 시작된다. 결국 가정은 파탄이 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소설에 대해 당시의 비난이 엄청났다. 교수들이 일제히 비난하고 교수부인은 양공주(洋公主)처럼 취급한다고 들고 일어났다고, 당시 신문에 기록되어 있다.
1956년이면 약 70년 전이다. 지금은 <은교>라는 영화가 나와도 교수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지금 논란인 것이 어느 시점에선 전혀 논란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