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넘어, 선택으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by 마음 자서전


폴 토머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좌절된 혁명의 잔해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과거의 망령을 털어내고 자신의 삶을 재구성해 나가는지를 집요하게 탐색하는 영화다. 이 작품을 심리학적으로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부모 세대의 실패가 자녀에게 전이되는 ‘트라우마의 대물림’과, 그 사슬을 끊어내려는 ‘자기 결정’의 의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고대 비극 속 오이디푸스의 운명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지성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아버지를 살해할 운명’이라는 신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자신도 모르게 친부를 살해한다.”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2022)

윌라는 자신의 출생과 혈통, 그리고 부모 세대의 신념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며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윌라는 유전적 조건이나 환경적 결핍에 함몰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스스로 구성해 나가는 ‘창조적 자기’를 구현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생물학적 아버지 록조의 ‘사악한 씨앗’이자 퍼피디아의 ‘폭력적 유산’이라는 이중의 굴레 속에서 태어났지만, 수녀원에서의 혹독한 훈련과 양아버지 밥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그 유산을 새로운 가치로 전환한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폭력의 반복이 아니라 연대와 평화적 시위라는 상위의 가치다. 이는 아들러가 강조한 ‘사회적 관심’의 실천이며, 부모의 미결 과업을 자신의 운명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한 주체적 인간의 탄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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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 영화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방어기제’의 관점에서도 풍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윌라는 자신의 생물학적 근원인 록조를 부정하고 그를 응징하려는 여정에 나섬으로써 상징적인 ‘부친 살해’의 과정을 겪는다. 이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자신의 기원을 넘어서는 심리적 단절의 과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윌라는 그 빈자리를 또 다른 권위로 채우지 않는다. 오히려 결핍되고 나약한 존재인 양아버지 밥을 선택함으로써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를 해체한다.


한편, 밥이 혁명의 암호를 잊어버린 것은 과거의 죄책감과 이념의 실패를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은 ‘억압(repression)’의 결과로 읽힌다. 그는 여전히 과거의 상징에 붙잡힌 채 ‘고착(fixation)’된 상태를 보이지만, 딸 윌라 앞에서 “나는 네 아빠다”라고 말하는 순간 비로소 억압된 자아를 해방하고 현재의 시간으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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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과거의 이념을 이해했던 사람이지만, 그것을 끝내 수행하지 못한 채 무너진 인물이다. 그는 ‘알았던 사람’이면서 동시에 ‘실패한 사람’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실패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실패를 통해 새로운 관계와 회복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카체이스 장면은 이러한 심리적 역동을 시각적으로 응축한 장면이다. 굴곡진 언덕길을 달리는 세 대의 자동차는 불안정한 무의식의 층위를 떠도는 인간의 모습과도 같다. 윌라가 맨 앞에서 길을 이끌며 아버지를 시험하는 과정은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기 위한 ‘분리-개별화’의 의식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암호라는 이념적 장치를 통해 상대의 신뢰를 확인하지만, 그 답이 ‘혁명’이 아닌 ‘사랑’으로 돌아왔을 때 눈물을 흘리며 화해에 이른다. 이는 초자아(Super-ego)가 요구하는 냉혹한 규율을 자아(Ego)가 인간적 온기로 통합해 내는 과정이다.


결국 이 영화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던졌던 질문을 현대적으로 다시 반복한다.

인간은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이해는 구원으로 이어지는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정체를 인식함으로써 파멸에 이르렀다면, 윌라는 자신의 기원을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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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에서 윌라는 어머니의 폭력성을 반복하지 않고 오클랜드의 시위 현장으로 향한다. 그녀의 발걸음은 과거의 망령이 지배하던 ‘하나의 전투(One Battle)’를 넘어, 사랑과 연대가 기반이 된 ‘또 다른 전투(Another)’로 나아가는 상징적 행위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변형이며,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오이디푸스가 ‘자기 인식의 비극’을 보여주었다면, 윌라는 ‘자기 선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