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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김 Apr 18. 2017

봄비가 내리는 날에

-오늘도 수고했어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오늘은 비가 안 올 줄 알았다. 기상예보가 오늘도 틀린 줄 알았다. 출근할 때만 해도 구름 사이를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결국은 화창한 하루가 될 거라 예상했다.


 근데 언제부터 어두워졌던 걸까?


 일하는 중 잠시 여유가 생겨, 창밖을 바라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은 창을 타고 흘러 주르륵 자국을 내고, 거리에는 물웅덩이가 하나 둘 생기더니,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아우성쳤다. 바람은 어찌나 세게 불던지. 미세하게나마 창을 흔들고, 바람의 성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예상과 달리, 하늘은 봄을 따라 비와 함께 돌아왔다.


 예상과는 달랐지만 비가 내리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비 내리는 걸 좋아하고, 특히 봄비는 유독 나를 위로해준다. 봄에는 그리 강한 비는 내리지 않는다. 장대비 같이 눈 앞을 수직의 물줄기로 가리지도 않고, 며칠 동안 내리는 고집스러움도 없고, 촉촉하다 못해 습해지는 부담을 주지도 않는다. 가벼운 포옹 같은 느낌이다. 오늘도 수고한 당신에게 '수고했다며' 가볍게 나를 안아주는 엄마의 포옹, 연인의 포옹, 사랑하는 사람의 포옹 같은 느낌 말이다. 봄비는 그렇게 포옹처럼 나를 감싸 안는 기분이다. 그 안에서 편안함, 위로, 휴식을 느낀다.

 봄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런 상상을 한다. 조금은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창문은 살짝 열어놓고 빗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는 나의 모습. 집에 돌아올 때까지 비가 내리면 이것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된다. 때로는 늦은 밤까지 비가 내리길 바라기도 한다. 아늑한 공간에서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실 때 그 평온함. 더군다나 봄비마저 내리니 정신과 육체는 이완되어 한없이 늘어진다. 그 순간만큼은 나를 구속하는 것은 무엇도 없으니. 또 다른 상상을 하기도 한다. 봄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 가끔 이 상상도 현실이 된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비가 그쳐 밖은 조용하지만 시기가 맞아 들어 떠오르는 상념들을 글로 쓸 때도 있다. 그때의 글들은 약간은 농밀해진다. 나는 이 농밀함을 즐긴다. 평소에는 의식의 범위를 이성이 유지하여 감성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이런 특별한 날, 봄비가 내리는 날에는 이성은 한 걸음 물러난다. 내 안에 숨어있던 조금은 유치할 수도, 적나라한, 야릇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봉인이 해제된 나를 만나게 된다. 나는 그 모습을 즐긴다. 통제되지 않은 내 모습을 보면서 그간의 권태스러움을 씻어버린다. 나는 그렇게 봄비를 기다린다.


 그럼 언제부터 봄비를 좋아하게 된 걸까?


 겨울이었다. 아직 매서운 찬바람이 불지는 않았지만, 만물이 조금씩 숨을 죽이는 겨울 냄새가 나는 날이었다. 또 겨울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비가 내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초겨울의 비를 보고 봄비가 내린다고 했다. 가을비도 아니고 겨울비도 아니고 그 사람은 분명히 봄비라고 말했다. 엉뚱한 소리라, 겨울비라 반박했지만 이것은 봄비라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 역설적인 상황 속, 그날부터 나는 '봄비' 가 좋아졌다. 봄비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도 좋았다. 묘하고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 한 즐거웠던 기억도 떠오르고,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얼른 오기 바라는 소망도 담겨있어, 마치 편지처럼 느껴진다.


 '봄비'가 내게 편지가 된 지 몇 해가 지났지만, 아직까지 나는 봄비를 좋아한다. 여전히 묘하고 신비롭다. 글을 쓰면서도 창밖을 바라보며 봄비가 내리는 모습을 그려본다. 따뜻한 차 한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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