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플 May 23. 2023

송별회를 거부하다.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퇴사일까지 남은 날은 일주일이다. 오늘은 월요일, 출근은 다섯 번만 하면 된다. 2744일째.

출근길은 여전하다. 직장으로 가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차가 서는 소리를 겨우 듣고 허둥지둥 하차했다. 조느라고 못 들을 수도 있을 버스 문 열리는 소리를 듣는 것도 신비한 능력이다. 어떻게 내릴 그 순간에 정확히 몸이 알아차리는 것일까.



 버스 정류장에서 직장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15분 남짓이다. 헛둘헛둘 서둘러 열심히 걸어가는 동안에 발걸음이 바쁜 것과는 상반되게 여전히 정신은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채 비몽사몽이다. 일주일이 남던지 한 달이 남던지 출근길은 늘 쫓기며 피곤한 게 진리인가 보다.



 5월이 시작되었다. 월말에는 월말에 해야 할 업무로 바빴다. 거래처별로 거래내역을 이메일이나 팩스로 보내고 통장에 입금되는 금액을 정산하고 계산서도 발급했다. 회사 전체적으로도 월말에는 제작해야 할 주문이 쌓여 바쁘다. 그에 비해 월초는 한가하다. 내 업무도 달이 바뀌면 나아질까 싶었는데 그간의 실적을 장부로 정리해야 하기에 마찬가지이다. 서류들을 넘기며 엑셀에 숫자를 기입하느라 자리에 앉자마자 눈과 손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바쁘지만 늘상 그랬듯이 쓱쓱 처리해 내고 만다. 일이 내가 되는 물아일체의 하루. 무감각으로 인해 아무런 느낌이 없는 하루.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특별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은 점심시간에 일어났다. 우리는 모두가 한 식당에 모여 백반으로 점심 식사를 한다. 특별히 맛있지도 않고 맛없지도 않은 식당이다. 좋은 점이라면 메뉴를 고를 필요가 없고 앉기만 하면 상이 차려진다는 것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장님 포함 여덟 명의 직원이 두 개의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고 있을 때, 회사 동료 언니가 사장님께 금요일쯤 회식을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나에게도 시간을 비우라고 하였다. 아니, 비울 수 있냐고 물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나에게로 주의가 집중되는 것을 받아치듯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녁 회식에 참석하기 싫다는 무언의 표시를 한 것이었다. 뭔가, 당황한 듯한 언니와 사장님.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의 식사가 이어졌다.




 점심 식사 후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사장님이 다시금 목요일이나 금요일 저녁에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하였다. 아직 내 의중이 덜 전달되었나 보다.  나는 곤란한 얼굴로 사장님의 눈도 마주 보지 못하고 속삭이듯이 "저는 집이 좋은데요. 집에 일찍 가려고요."라며 거절의 뜻을 전하였다.



 같이 산책을 다녀와 곁에서 사장님과의 대화를 지 켜 보던 후임님은 "당신을 위해 약속 잡으려는 건데." 라며 식사 자리의 뜻을 알 텐데 굳이 거절하느냐며 아쉬움을 전했다. 그러게 말이다. 뻔히 보이는 송별 자리가 싫어 나는 굳이 딱딱하게 고개를 젓고 절레절레 손사래를 친 것이다.



 퇴근하는 길에 마음이 쓰여 식사 시간을 제안한 선배 언니에게 문자를 보내 조용히 퇴사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아무리 시뮬레이션해봐도 의례히 벌어질 식사자리, 고기 굽는 모습과 수고했다는 인사와 술잔을 기울일 사람들의 풍경이 의미 없이 보이고 불편할게 싫다. 퇴사자에게는 송별회 거부권이 있지 않은가.



 나는 송별회를 거부했으면서도 동시에  좋은 취지로 인사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싹둑 거절하는 못된 성미에 혀를 찬다. 그리고, 아직 4일 남은 근무일 포함 하여 2748일에 대해 돌아본다. 무척 좋아하고 즐거워했었던 일이 왜 이렇게 힘들어졌나. 떠나가는 마당에 밥 한 끼 같이 할 정(情)도 남지 않았나.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왜 그렇게 야박하냐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직장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회식 자리를 빠진 적도 없고 불편해한 적도 없었다. 내가 회계 처리를 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필요한 정보들은 알려 드리고 각종 개인적인 사무 처리도 해결해 드렸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성의를 다했다.



 그런데, 직원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서 해 왔던 일들이 어느 순간 내게 짐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돕는 일이 내 일이 되고 업무가 늘어나면서 시간이 부족해지고 해야 할 일이 쌓이면서부터이다. 나의 마음에 섭섭함이 가득해졌다. 하나라도 도와주고자 애썼는데 내가 힘든 순간에 내게 더 일하라는 압박 말고는 숨 쉴 구멍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공감하고 내 입장을 대변해 주는 동료가 없다는 것이 억울했다.



 그래서, 같이 식사하는 게 영 불편하고 못마땅하다. 잘잘 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2748일에 대해 내가 잘하고 못하고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나에게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나를 방치했던 이 시간에 대한 결론이 이제는 떠나는 방법으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퇴사를 이혼에 빗대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워서 헤어지겠는가. 함께 살았던 시간, 공유했던 추억들, 그리고 일상의 루틴이 이혼으로 인해 원점으로 돌아간다. 퇴사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적, 시간적, 생산적 공동체였던 우리가 헤어지는 일이다. 좋게 이혼하는 사람들은 이혼 도장 찍고서도 밥 한 끼 먹고 헤어지기도 하겠지만 나는 내 내면의 정리가 너무도 필요하여  퇴사 송별회에 마주하며 밥 한술 같이 뜨는 여유도 마땅치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전, 마지막 휴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