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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글이드 Oct 20. 2017

그럴듯한 무직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유난스러웠던 상반기에 비해 지난 3개월은 무서우리만큼 잠잠했다. 무더위가 한창이었던 8월경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출입국신고서를 작성하던 중 직업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직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취업 준비생이라고 하기엔 양심에 찔렸다. 어쩌면 취업 실패생 쪽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백수라고 적기엔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고민 끝에 무직이라고 적었다. 담담한 무게감이 좋았다. 하늘 위에서 직업이 없음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자신이 우스웠다. 여행을 마친 이후로도 나는 그럴듯한 무직 생활을 보냈다. 물론 지금도 진행형이다. 생각보다 담담했던 지난 3개월간의 삶을 회고한다.



한 달, 창고로 돌아간 캐리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펼쳤다. 짐을 풀어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그중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짐과 새롭게 생긴 짐도 있었다. 두 유형의 짐에서 내가 보였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온 아쉬움, 그러나 그 안에서 얻은 새로운 경험과 배움이 떠올랐다. 빼곡했던 짐이 하나둘 사라질 때마다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나에게 캐리어와 짐은 단어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마침내 텅 비워진 28인치 두 캐리어는 아빠 손에 이끌려 창고로 돌아갔다. 당분간 나도 이 집에 정착한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미국에 도착해서는 시차를 느끼지 못했다. 두 차례의 경유와 오랜 연착으로 피로가 쌓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을 몸이 알았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반대로 한국에 돌아와서는 시차 적응이 필요했다. 직항을 타서 피로가 덜했기 때문인지 혹은 당분간 적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한동안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났다. 재취업을 준비하기에 앞서 재충전을 위한 여행 계획을 세웠다. 고민 끝에 엄마와 도쿄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두 달, 도쿄에 의미부여

5박 6일간 일본 도쿄로 여행을 다녀왔다. 도쿄를 처음 만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즐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여행 전, 화제였던 <퇴사 준비생의 도쿄>를 비롯해 <WALK TOKYO>와 <TOKYO SHOP>을 읽으며 도쿄에 대한 인상이 깊어졌다. 이 외에도 다양한 매체에서 도쿄와 관련한 정보를 접하던 시기였다. 개인적으로 인사이트를 얻고 오기 충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컸다.


5일 동안 돌아본 도쿄는 기대에 부응했다. 빠르면서 천천히 가지만, 느리면서 빨리 가는 느낌이 좋았다. 심플함과 아기자기함의 경계 역시 취향을 저격했다.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쓰는 꼼꼼함과 개성이 드러나는 차별성은 눈에 띄기 충분했다. 도쿄의 크고 작은 부분들이 각자만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나부랭이의 개인적인 소견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거리인 다이칸야마와 지유가오카가 기억에 남는다. 평일에 가서 그런지 생각보다 한적했다. 이곳에서는 일본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가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트렌디한 카페나 디저트 가게는 물론이다. 인상 깊었던 공간은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서점>, 지유가오카의 <TODAY'S SPECIAL>, 긴자의 <이토야> 그리고 롯폰기의 <도쿄 미드타운>이다. 공간을 즐겁게 경험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한몫했다. 이곳들이 유명해진 이유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글로 보는 것과 실제 현장을 경험하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반면에 <아코메야>와 <마구로 마트>, <시루 카페>를 가지 못한 것은 아쉽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지인 근교의 가마쿠라에 가지 못한 점 또한 격렬하게 아쉽다. 마지막으로 나만의 시각으로 찾은 장소가 없어서 아쉽다. 늦기 전에 다시 도쿄에 가보고 싶다.


<5박 6일 도쿄 여행>
1일 차: 신바시/롯폰기/아카사카
2일 차: 디즈니랜드
3일 차: 긴자/신주쿠/시부야/하라주쿠
4일 차: 지유가오카/다이칸야마/우에노
5일 차: 오다이바/도쿄역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미국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위로이자 취업 준비를 위한 충전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엄마와 함께하는 첫 여행이었다. 나는 엄마를 의지했고, 엄마는 나를 의지했다. 더운 날씨에 여행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걸을 일도 많았고, 헤매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체력을 뽐내며 여유로운 미소를 날려주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엄마는 내 앞에서 여전히 강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모녀의 첫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여행을 기대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취업을 향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석 달, 즐거운 오늘

나와 약속한 구직 준비의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서류를 넣고 싶진 않았다. 미국에서 얻은 강한 담대함과 용기는 야속하게도 쉽게 잊혀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노트북을 챙겨 나갔다. 목적 없는 출발은 무의미한 하루로 끝이 났다. 시간만 버리고 돌아오는 하루가 아까웠다. 이 시간이 반복되자 우울감이 들었다. 그리고 문제의식을 느꼈다. '구직을 즐겁게 할 수 없을까?', '오늘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없을까?' 고민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러나 돈이 필요했고, 경제적인 부담을 느꼈다. 결국 가까운 일상에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책이다. 집 근처 북파크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동안 책 읽기의 중요성은 알았지만, 책 읽기의 재미는 알지 못했다. 책은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존재였다.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동화책, 소설, 시, 문학, 사회과학, 미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일단 읽었다. 저녁까지 읽을 때도 있었고, 10분을 읽을 때도 있었다. 읽고 싶은 책을 중심으로 읽고 싶을 때까지만 읽었다. 어느새 책 읽는 행위는 즐거움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일주일에 4~5권 정도 읽은 것 같다. 평소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다. 고작 한 달 만에 책 읽기를 통해 무엇이 성장하고 변화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20년 동안 어색한 사이로 지낸 책과 놀랄 만큼 친해졌다. 읽을수록 읽고 싶은 책이 많아진다. 독서의 선순환인 것 같다. 앞으로 책에 대한 목표는 지금의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일 한페이지 이상은 읽어야겠다.


두 번째는 창작이다. 평소 사진 찍는 것과 시 쓰는 것을 좋아한다. 슬프게도 실력은 형편없다. 마이웨이로 주위 소수의 사람에게 공유하던 것을 확장했다. 인스타그램에 새로 계정을 개설했다. 꾸준히 올리면서 창작에 대한 재미도 책만큼이나 높아졌다. 발견과 상상을 바탕으로 창작하는 과정이 즐겁다. 꿈이 있다면, 이러한 연습을 거쳐 먼 훗날에 동화작가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 신기한 건 사진을 찍고, 시를 쓰면서 동화책의 소재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언젠가 나의 창작이 동화책으로 확장되길 바란다. 또 하나는 평소 관심 있던 일러스트를 배우고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를 보고 따라 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이 역시 즐겁다. 미술 7등급이라는 치명적인 오류에도 매직 마우스와 기술력이 나의 똥 손에 힘을 보태준다. 주위의 훌륭한 디자이너분들이 가르침을 주니 이 또한 감사하다.


세 번째는 영어다. 미국을 다녀와서 영어 공부에 대한 의욕이 강해졌다. 물론 토익 같은 시험 영어가 아닌 실용적인 영어다. 한 영화를 100번 이상 보면 영어가 트인다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실험에 참여 중이다. 여러 영화를 방황하다 민 걸즈에 정착했다. 정확한 횟수를 세지 않아 아쉽지만, 현재까지 대략 40번 정도를 시청했다. 초반에는 안 들리던 문장이 이제는 귀에 들린다. 주인공들이 어떤 대사를 뱉을지 감이 온다. 신기했다. 100번을 다 채우면 대사 암기도 가능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다만 비속어도 함께 늘었다는 것은 함정이다. 민걸즈 말고도 다양한 영어 매체를 접하며 영어에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언젠가 영어가 빵 하고 트이는 날을 꿈꾼다.


이 외에도 함께여서 덜 외로운 모임에 참여한다. 말 그대로 외롭지 않은, 기획자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제 절반이 지났다. 진한 울림이 전달되는 스피커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나와 비슷하면서 다른 학생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사이트를 얻는다. 모두가 나의 선생님이다. 이곳에서는 서로가 가진 외로움과 고민, 앞으로 나아갈 도전이 오고 간다. 무엇보다 나를 배운다. 나의 과거에 기획이 존재했고, 지금도 (삶을) 기획 중이고, 앞으로도 (직무와 삶에서)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기획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남은 절반의 수업이 아쉬우면서도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잠시나마 해외 취업을 준비했다. 미국에서 못다 이룬 목표가 계속 아쉬움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원래 귀국 예정이었던 1월이 되기 전, 후회 없는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 곳에서 인턴십 관련 긍정적인 제안을 받았다. 스폰서가 과정 대부분을 대신해주었던 과거와 달리, 잡서칭부터 인터뷰 진행, 합격 이후의 커뮤니케이션까지 구직 전반을 홀로 해냈다. 비즈니스 영어 메일과 소통, 그리고 현지 생활을 위한 중요한 요소 등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감사한 인연들이 존재했다. 세상이 참 좁다고 느끼는 한 해다. 현재는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고민의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을 경험한 것만으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가든 안 가든 나의 도전은 다시 시작된다.



그럴듯한 무직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무의미한 시간은 찾아온다. 그러나 의미를 되찾으려 노력한다. 실행하며 배우는 과정은 언제나 보람차다. 기약 없는 구직 앞에서 오늘도 나는 그럴듯하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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