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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노란 Dec 17. 2024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법

상처 받은 나를 위하여

초기 대학 생활은 언젠가 상상했던 20대의 여느 날과 다름 없었다.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고등학교 도서관보다 훨씬 큰 대학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고, 학교 선배들의 도움으로 기획서 쓰는 법을 배웠다. 글쓰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기획서든, 분석서든, 레포트든, 블로그든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 감사하게도 부족한 글재주를 좋게 여겨준 분들 덕분에 공모전에서 두어 번 수상도 하고 학회에서 후배들을 가르칠 기회도 있었다. 학과 소모임의 매니저 역할을 맡거나 컴퓨터 좀 만져봤다는 이유로 교내 컴퓨터실에서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161cm에 40kg라는 다소 여린 체구에도 술을 꽤 잘 마셔서 여기저기 술자리에 불려다니는 일도 잦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끊임 없이 이성에게 고백을 받았다. 어떤 놈은 내가 남자친구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줄 아느냐'라며 서너 번씩 고백 공격을 했고, 키가 커다란 어떤 놈은 내 앞에서 얼굴이 벌개진 채 말 한 마디도 못하다가 '사귀자'며 용기를 내기도 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후배가 술에 잔뜩 취해 귀가하는 내게 '누나 좋아해요' 라고 고백한 적도 있고, 어떤 선배는 별 보러 가자며 나를 차에 태워 학교 근처 산으로 데려가서는 '사실 그동안 좋아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같은 기숙사에 살던 언니는 본인이 평소 좋아하던 오빠가 발렌타인 데이에 내게만 디저트를 선물했다는 이유로 대학 졸업할 때까지 나를 미워했다. 내게 차인 뒤에도 나를 잊지 못한 어떤 동기는 자신에게 고백하는 후배에게 '나 아직 걔 좋아해'라고 말하는 바람에 본 적도 없는 후배에게 미움 받은 일도 있었고, 서로 누나를 집에 바래다 주겠다며 만취한 후배놈 셋이 말다툼을 버린 일도 있었다. (싸움이 너무 길어져서 결국 혼자 집에 갔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야말로 핑크빛 청춘이었다. 하하.


다시 없을 20대 초반을 즐겨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의 여유가 없던 그때의 나는 내게 쏟아지는 마음들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나는 내게 고백했던, 고백하고 싶어했던 사람들과 일부러 거리를 뒀고 정말 견딜 수 없을 즈음이 되면 내게 고백한 이들 중 한 사람과 연애를 했다.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이때의 연애는 사랑이 아니라 거절이 아닌 방법으로 고백 공격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당연히 매 연애가 짧게 막을 내렸다.


그러던 나는 대학생활이 중반을 지난 2학년 2학기 끝 무렵, 총학생회 임원이 되었다.




내게 기획서 쓰는 법을 알려주던 선배가 부총학생회장이 되었다. 선배는 총학생회장과 함께 일 잘하는 후배들을 몇몇을 추려 학생회를 꾸렸다. 문서 잘 쓰고, 적당히 예쁘장하고, 술 잘 마시던 나 역시 그가 꾸린 학생회 임원 중 한 명이었다.


운동권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학생회 티셔츠 만들기, 이전 학생회 서류 정리하기 따위의 소소한 일을 주로 했다. 같은 학교 학생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건 즐거웠지만 가끔 졸업생 대표를 비롯한 높으신 분들이 오시면 쫓아가 술 따르는 일을 해야 했던 건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부총학생회장이 된 선배는 학생회 내에서 제 여자친구를 쏙 뺀 여자애들만 모아 술자리에 내보냈다. 역겨운 자리였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이라 웬만해서는 취하지 않는데 그런 날이면 필름이 뚝 끊겼다. 내게 남은 건 함께 술 접대를 갔던 친구가 낯선 길거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우는 걸 다독였던 기억 뿐이었다.


그때 그만뒀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럼에도 그 조직에서 어떻게든 견디기를 선택했다.


일은 대학 축제 준비가 한창일 때 벌어졌다. 정신 없었던 축제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학생회 임원이었던 오빠로부터 고백을 받았다. 군대도 다녀온 데다가 휴학을 오래해서 나이가 꽤 많았던 오빠는 키가 커서 교내 농구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말쑥하게 생긴 데다가 노골적으로 여학생들을 술자리에 내보내는 데에 반대를 표하던 사람이었다. 싫지 않았다.


놀랍게도 나는 여섯 번에 달하는 연애를 하면서 겨우 뽀뽀만 해본 쑥맥이었는데 이날은 술에 취한 탓인지 곧장 룸으로 향했다. 첫경험이었다. 오빠는 다정했다. 폭력적이지 않았고, 분위기 역시 좋았다. 오빠가 다정하지 않았거나 폭력적이었거나 분위기가 나빴다면 달랐을까 싶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관계를 끝내고 오빠는 돌아갔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나는 우리가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고백을 했고, 받았고, 다정히 밤을 보냈으니 당연히 연인이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오빠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 숙취가 심한가 싶어 문자를 남겼지만 답은 없었다. 점심이 지나 다시 두어 번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빠의 룸메이트가 전화를 받아서 내게 소리쳤다. '스토커 년아 적당히 하고 꺼져!' 그때의 당혹스러움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울먹이며 무작정 오빠가 다니는 공과대학 건물을 찾았다. 전기과 학과 사무실 앞에서 서성이자 쟤는 무언가 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쏟아졌고 곧 과사를 지나던 오빠와 마주쳤다. 오빠는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며 놀랐다. 그는 나를 숨기듯 건물에서 데리고 나왔고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나와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그날 밤, 오빠는 나와 한 번 자보고 싶어서 좋아한다고 거짓 고백을 했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렇다고 나와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아서 룸메이트에게는 얘가 자기를 좋아해서 스토커처럼 쫓아다닌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일 모레면 서른인 사내가 이렇게까지 보잘 것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런 놈과 내 한 번 뿐인 첫날밤을 보냈다는 게 분하고 화가 났다. 심지어 이 오빠의 룸메이트는 나와 같은 과 후배의 형이었다. 내가 이 오빠를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면서 수시로 전화하고 과사까지 쫓아와 만나달라고 조르는 개념 없는 년'이라는 소문이 같은 과 전체에 퍼져버린 뒤였다.


글로 적어 놓으니 참 보잘 것 없는 소문인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무서웠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수백 개의 눈알들이 나를 노려보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내 앞에서 나를 욕하면 그런 거 아니라고 반박이라도 했을 텐데, 그저 뒤에서만 쑥덕이는 소리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나는 집안에 틀어박히기를 선택했다. 밤새 술을 퍼마시고서도 남들보다 먼저 들어가던 1교시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방구석에서 울다가 커튼 쳐놓은 창 밖 복도로 사람들이 지나가면 숨을 죽였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또 이런 일이 일어나나. 나는 평생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내 얼굴을 불로 지져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난생 처음,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동시에 슬프고 두려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멀리 타 지역에 사는 친구들이 나를 안쓰럽게 여기며 대신 화를 내주는 것만이 이 시기 나의 몇 안 되는 위안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 오빠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더는 졸업을 미루지 않고 아버지에게 중장비 운전하는 법을 배울 예정이라고도 했다.


지은 놈들은 하나 같이 미래 계획을 내게 설명하는구나. 앞으로 반성하고 건실하게 살테니 용서해 달라는 의미인 걸까? 그의 다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혹여 진짜라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받아들였다. 나는 '네, 오빠. 저는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다. 그와 커다란 중장비 차 안에 나란히 앉아서,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시꺼먼 운동장을 바라보며 나는 그의 거짓말들을 용서했다.


내가 대인배라서는 아니었다. 나는 그가 앞으로 건실하게 살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마음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누군가를 미워한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자를 경찰에 신고하거나 고소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 내 상처가 치유될까? 나는 며칠 사이 그렇지 않다는 답을 내렸을 뿐이었다. 사과해 주었으니 되었다. 나는 이 사람과의 갈등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를 괴롭게 하는 사건과 감정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축제는 성황이었다. 학생회가 기획해 클럽으로 개조한 강당은 사람으로 가득했고,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춤을 추는 대신 내가 상처 받으며 이뤄 놓은 결과물을 내려다 보았다.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래, 누구라도 즐거우면 되었다. 나는 나중에 진짜 클럽가서 놀면 되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결국 클럽은 번도 가보지 못한 결혼을 해버렸지만)


축제가 끝난 뒤 나는 학생회를 그만두었다.


나를 상처 주던 단체에서 해방되었고, 나를 상대를 용서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짠 하고 명랑하던 나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물론 나아진 점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자주 울었지만 전처럼 방에 틀어박히는 대신 밖으로 나와 술을 진탕 마셨다. 돈이 없어 안주 대신 정수기 물을 떠다 놓고 깡소주를 마셨다. 어제 두 병, 오늘 두 병 반, 내일 한 병, 모레는 세 병. 매일 술을 마셨고, 매일 만취했다. 매일 너무 빨리 취해버린 탓에 같이 술 마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술을 마시면 웃음이 나왔고 웃으면 하루가 꽤 버틸만 했다.


축제가 끝난 5월 말.

나는 그날도 여느 날처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진탕 술을 마시고 만취한 채 비틀거리며 홀로 새벽길을 걸었다. 학교 건물 뒤편 산에 가득한 아카시아 나무가 늦봄 바람에 흔들리며 아카시아 향기가 물씬 풍겼다. 학교 앞 벤치에 앉았다. 고요하고 고즈넉한 교정과 코끝을 맴도는 아카시아 향기가 무척 만족스러웠고, 왜인지 울컥 눈물이 났다.


혼자 벤치에 앉아 울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곁에 앉았다. 아, 빈 벤치 많은데 왜 하필 여기 앉나. 불쾌한 마음이 치밀어 오르려는 때에 옆에 앉은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왜 혼자 울고 계세요, 예쁜 후배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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