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기였다. 나는 우주 속에 혼자 남겨진 기분을 느끼곤 했다. 당시 나는 교대 진학이나 공무원 준비를 원하는 부모님과 갈등을 빚고 있었기 때문에 내 상황을 부모님께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 학교 역시 미대 진학을 원하는 나와 친구들을 소위 '날라리' 취급하며 방치하는 탓에 선생님들께도 상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내 편을 들어주던 건 함께 게임을 했던 언니였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마르고 예쁘다는 인상만은 기억에 남아있다. 언니는 내 전남친을 시원하게 욕하며 내 편을 들어주던 사람이었지만 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았기에 온전히 의지하기 어려웠다. 나보다 한두 살 많았던 언니는 아버지의 가정폭력 때문에 수시로 가출을 했고, 그때마다 지하철이나 지하상가 등에서 노숙하느라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때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그 다음 남자친구였다. "힘들 때 곁에 머물러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갈 수 밖에 없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 이보다 그때의 나를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에게서 나를 지켜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나를 보듬어주고,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이 사람에게 빠져들었다.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는 게임을 그리 성실히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알고보니 현실 생활이 바빠서였다. 당연한 얘기였다. 이 사람에게 게임은 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 즐기는 취미생활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 그는 법대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고, 상의를 벗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제 프로필 사진으로 정해둘 만큼 식단과 운동을 철저히 하는 사람이었으며, ROTC 활동까지 겸하고 있었다. 취미는 요리, 특기는 노래였던 그 사람은 활동적이고 쾌활하고 사람들과 두루 잘 어울렸다.
미안하게도, 그 사람과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2년 가까운 시간동안 연인이었다는 사실과 내가 그 사람을 위해 준비했던 선물들, 그 사람이 내게 해준 이벤트 등 자잘한 추억은 선명히 기억한다. 다정하고, 정의감이 투절하고, 자신이 한 약속은 무엇이든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이전 남자친구에게서 받은 상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고 연인으로서 함께 하는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입맞춤과 포옹 외에 어떤 신체 접촉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건 당시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에 부족함 없는 노력이었다.
다정한 새 남자친구의 애정 속에서 나는 미대 입시를 치뤘다. 남이 내게 쏟는 애정이 거북하고 어색해서 거절하던 나도 그 때는 타인의 애정에 기껍게 매달렸다. 그 해 입시 주제는 평소보다 어려워서 실력이 좋던 학원 친구들 여럿이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나는 운이 좋았는지 평소보다 더 나은 그림을 그렸고, 수능에서도 해당 대학의 커트라인에 해당하는 점수 이상을 받았다.
내 이름이 학교 정문에 걸렸다. 그렇게나 문제아 취급을 받던 나와 내 친구들은 줄줄이 홍대, 세종대, 국민대에 연이어 합격 소식을 알렸다. 미대 입시를 반대하던 부모님 역시 내 합격 소식에 기뻐하셨다. 우울하기 짝이 없던 내 청소년기는 그렇게 반짝이는 대학 합격 통지서로 마무리지었다. 나는 기뻤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모든 게 완벽했는데, 내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그는 그런 그림 같은 거, 나도 조금만 연습하면 그릴 수 있는 건데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말했다. 남자친구의 축하를 기대했던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어쩌면 심술이나 불안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대학 입학과 동시에 그는 임관해야 했으니까. (어디까지나 내 남자친구의 입장에서)예쁘기 그지 없는 여자친구를 대학에 보내놓고 자기는 군대를 가야한다니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래서인지 그는 임관 전후 내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피앙세 반지를 선물해줬고,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커플 핸드폰을 선물해줬고, 직접 부른 사랑 노래로 가득한 CD도 선물해주었다. 그의 친구들은 나를 보며 "이 새끼처럼 좋은 놈이 어디 있나 보세요" 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야속하게도 시간이 흘러 그는 군대로, 나는 대학으로 향했다. 교수님들은 열정적이었고, 교과도 흥미로웠지만 나는 대학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어렵게 입시를 치른 탓인지 대학 입학 직후 그림에 대한 욕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때 나는 그림 그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영혼이 죽어버린 채 무의미한 채색 행위를 반복하는 존재였다.
남자친구는 군 생활로 힘들어 했지만 나는 그의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고, 나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대학 생활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에게 의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는 테헤란로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내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하면서 살게 해주겠다고 하는 동시에 직업 군인으로 살고 싶은 자신의 곁을 지켜주길 바랐다.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어 고통스러운 와중에 그림 따위가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말하는 남자친구가 서운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헤어졌다.
다음은 헤어진 직후 인터넷 커뮤니티에 써놓은 글의 일부이다.
저희는 나이로는 세살, 학년으로는 네살차이는 나는 커플이었습니다. 600일가까이 사귀는 동한 싸움한번 크게 하는 일 없이 잘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에 들어가고 과제와 시험, 소모임등의 일로 힘들어져서 연락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권태기라는게 찾아온거였죠. 장교였던 남자친구는 그 시절 선임들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어했고 저는 속으로 권태기가 빨리 지나가길 기다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죠. 그렇게 혼자 한달쯤 있으니까 너무너무 힘들더라구요. 혼자사는 것도 아니고, 기숙사에서 넷이 사는데 매일 울고 불고 하는 것도 꼴불견이고..
그래서 하루는 전화를 해서 말했어요, 나 권태기 인것 같다고. 처음엔 화를 냈어요 권태기가 말이 되냐고 너무 상처받은 저는 일주일 뒤에 헤어지자고 말했어요.
내가 네 번의 연애만에 처음으로 겪은 평범한 연애와 이별이었다. 나도 상대방도 아파했고, 많이 울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세월은 상처 위에 덧씌워졌고, 나는 이제 조금 아련한 기분으로 그때를 회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전에 만났던 남자친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마도 김 씨였던 것 같다) 이 이후에 만났던 남자 중 누군가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사람의 이름 석 자만은 선명히 기억한다. 이별하고 10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이 사람이 강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다는 뉴스 기사를 보았다. 정의롭고 용감하고, 딱 그 사람다운 행동이었다.
장르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나는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제목의 로맨스 소설을 쓴 썼다. (지금은 판매하지 않는다) 이 작품을 쓰면서 나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묻고 싶었다. 한 때 나를 구원해줬던 좋은 사람이 더는 좋은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하며 글을 썼고, 이 질문은 이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 새로운 힘듦과 권태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낸 그가 더는 좋은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헤어진 연인이 대체로 상대를 좋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듯이, 그 당시의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이 어떻게 늘 좋기만 할 수 있을까. 그가 한 때 나에게 화를 냈고, 가끔 나를 실망시켰고, 내가 하는 일을 낮추고 무시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내 상처를 보듬어 주었고, 난생 처음 제대로 사랑 받는 평범한 연애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사내 놈들은 다 똑같은 쓰레기야' 따위의 성급한 일반화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새삼스럽지만 그는 무척이나 고마운, 나의 첫 사랑이었다.
오늘 쓴 글을 남편이 읽지 말아야 할 텐데 조금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