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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노란 Nov 26. 2024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래 본문은 그루밍 범죄와 가스라이팅을 묘사합니다.




10대 시절 나는 건강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보내는 대부분의 소녀들이 그렇듯 내 마음은 늘 우울과 불안, 통제할 수 없는 심리적 변화로 가득했다. 친구들과 까르르 웃을 때는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생각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유 없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꽤 귀여운 여학생이었는지 종종 고백 받는 일이 있었고, 누군가 나를 좋아해서 용기를 내어줬다는 사실이 기뻐서 상대의 마음을 곧잘 받아들였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나란히 걷다가 학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야 서로를 바라보고 어색하게 웃음짓던 연애였다.


하지만 나는 사춘기일 뿐 아니라 제대로 사랑받는 법 역시 몰랐다. 상대가 나를 사랑해준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나를 조건 없이 그저 좋아해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연애를 하면서도 상대가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길 바랐다. 어느 날, 나는 내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수시로 전화를 거는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전화비가 아까우니까 전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두 번의 연애는 모두 100일을 넘기지 못했다.




세 번째 남자친구는 가상 현실 세계에서 만났다. 하교 후 즐기던 온라인 게임에서였다.


당시 온라인 게임에는 함께 게임을 하는 상대방과 결혼을 하거나 의상을 맞춰 입을 수 있는 등 사회적 연결을 강화하는 게임 시스템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게임을 좋아하던 나는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연애나 결혼에 거부감이 없었다. 여고생인 척 게임에서 만난 남고생과 대화를 나누다가 내 대화 상대가 '남고생을 연기하던 같은 반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까르르 웃는 일도 있었다.


게임 속 연애를 가볍고 장난스럽고 놀이로 여기던 내게 게임 남자친구가 생겼다. 종일 게임을 하는 그 사람이었다. 학교와 학원을 마치고 느지막히 게임에 접속하면 남들보다 멋지게 차려입은 그 사람이 나를 기다렸다. 2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게임 속 길드 소속이었던 우리는 새벽까지 게임 속 세계에 앉아 여러 대화를 나누다가 연인이 되었다.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우리가 처음 실제로 만난 건 20여 명의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인 길드 오프라인 정모에서였다. 늘 가상 현실 속에서만 만나던 내 남자친구는 무척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나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당시 내 기준에서는 아저씨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퀭한 눈과 어색한 웃음, 굽은 어깨와 비쩍 마른 몸까지 어딜 봐도 근사한 구석이 없었다. 지방에서 전문대를 나왔지만 취직하지 않은 채 엄마와 함께 살면서 야간 피씨방 알바를 한다고 했다.


그날 모임이 끝나고 단 둘이 남았을 때, 상대는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겉모습이나 직업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고 배웠다.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모습에 실망하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헤어지자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비교적 먼 곳에 살았던 상대는 이전의 남자친구들처럼 학원 앞에서 나를 기다리거나 손을 잡지 않았고, 내가 게임에 접속하지 않는다면 만날 일이 없었다. 게다가 게임 속에서 그는 여전히 매력적인 리더였고, 다함께 게임 속에서 대화를 나눌 때는 유쾌하고 즐겁기도 했었다. 나는 실제로 만난 상대를 향한 두려움과 게임 속에서 만나는 상대를 향한 호감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나는 본격적으로 원하던 대학의 입시를 준비했다. 당시 나는 학교 성적이 좋았고 그림 솜씨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서 미술로 가장 유명한 대학 중 한 곳의 입시를 준비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매일 4시간씩 실기 준비가 이어졌다. 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면 11시였고 나는 게임을 거의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람과 이렇게 멀어지다가 이별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상대방의 마음은 달랐다.


가끔 게임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내게 이상한 농담을 던졌다. 게임 캐릭터의 모습을 보며 "야하네"라고 말하거나 게임 캐릭터가 특정 자세를 취하게 한 뒤 "흐흐"하고 웃곤 했었다. 나는 상대를 애써 무시했으나 이번에는 문자 메세지가 오기 시작했다. "좋아해", "사랑해" 같은 고백이 적힌 문자 메시지가 오는가 하면 어느 날은 특정 인터넷 주소가 적힌 메시지가 오기도 했다. 일본의 19금 애니메이션의 링크였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소풍을 가는 날이라 학교 운동장에 버스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나는 낯설고 높은 버스의 창가 좌석에 앉아 서서히 멀어지는 학교와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그 링크를 눌러 보았다.


상대는 열여덟 살의 내게 잠자리를 요구했다. "네가 어려서 뭘 모르나본데,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랑 자야되는 거야." 그의 요구를 거절할수록 나는 나쁜 년이 되어갔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고, 심지어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었다. 나는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었다.


낭랑 18세, 순정만화를 사랑하던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나는 종교가 없었고, 스스로 그리 꽉 막힌 사람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예쁜 꽃다발, 낭만적인 분위기, 멋지고 맛있는 식사, 반짝이는 반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 같은 것들이 함께 하는 첫경험을 보내고 싶었다. 처음이니까, 소중하고 기념이 될 만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피씨방 아르바이트마저 내키지 않을 땐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가난했다. 그가 나와 2년이라는 시간을 연애하며 준 선물은 게임 속 아이템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는 나를 "ㅇㅇ장 여관"에 데려가고 싶어했다.


결국 고3을 눈앞에 둔 겨울, 나는 참지 못하고 함께 게임을 하던 길드 사람들에게 내 사정을 털어 놓았다. 사람들은 게임 속 인플루언서였던 그의 행태에 놀랐다. 그를 중심으로 뭉쳐 있던 길드는 와해되었다. 내가 그와 정확히 어떤 시점에 어떤 식으로 이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그와 이별했다.


그는 절망했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이 사람과 연애하며 가장 잘한 일은 내가 어디에 사는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나를 찾아다녔다. 이것보라고, 정비 기술자 자격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자기는 이제 새 삶을 살 예정이니 제발 돌아와달라고 애원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게 생겼어. 제발 계속 만나주면 안 되겠니?"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상대방과 와해된 길드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쏟아내는 비난 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쓰레기였다. 모든 건 내 잘못이었다. 연인을 사랑하지 않은 죄, 연인과 잠자리하지 않은 죄, 그러고는 이별을 고한 죄, 다시 받아달라는 요구를 무시한 죄, 그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죄. 와해된 길드에 소속되었던 다른 오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 형 인생은 어떻게 하라고?" 곧 고3이 되는 나는 스물여덟 살 먹은 아저씨의 게임 인생을 망쳤다는 이유로 비난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그와 다시 연인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것만큼은 나도 양보할 수 없었다.


당시 함께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친구들 중에는 소위 '발랑 까진 애들'이 많았다. 똥꼬가 보일 만큼 짧은 치마를 입고, 교실 구석에서 머리를 말고, 얼굴에 분칠을 하던 계집애들은 누구랑 누구랑 잤다느니 하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했다.


그래, 그랬구나.

내가 생각하는 낭만적인 연애 따위는 순정만화 속에만 존재하는구나. 서로를 아껴주는 연애나 아름다운 이별 같은 건 다 소설 속 이야기구나. 저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아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인 모양이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연애 따위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눈 내리던 열여덟 겨울에 한 다짐은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내 모든 사정을 알고도 나를 비난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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