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박사과정, 긍정과 침착 찾기
겨울 쿼터가 가장 여유로울 거라던 선배들의 위로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학업과 개인적인 사정 등으로 정신없는 3개월을 보내고 보니 벌써 4월이 코 앞이다.
이번 쿼터의 계량경제학은 Hansen(2022)의 Chapter1-12를 9주 안에 전부 소화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니 쌓아 올리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중간고사는 말 그대로 중간 정도 성적을 받았다. 아쉬웠다. 남은 박사과정 동안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계량은 더 잘해야 했기에, 남은 시간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밤새 낙담하기도 했다.
수업도 수업이지만, 이번 쿼터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너무 잦은 감정적 요동이었다. 나는 왜 여기에 와 있을까? 좋은 직장, 안락한 집, 안정적인 관계를 모두 뒤로 하고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나의 마음에는 어떤 확신이 있었던 걸까? 겨우 1년 전 일인데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의 마침표마다 이 질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사실은 그런 확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걱정하기를 멈추고 당장 내가 해야 할 것들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 이후부터 가장 많은 시간을 계량 공부에 투자했고,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뿌옇게만 느껴졌던 개념들이 하나하나 선명해질 때마다 보람도 느꼈다. 그래도 우울함이 찾아오는 날이면 그냥 맛있는 것을 먹으며 가장 편하게 쉬었다. 이렇게 한 쿼터가 끝나고 나니, 나를 괴롭히던 수많은 질문들이 더 이상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지 않는다. 기말고사에서는 최고점을 받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2월 급작스럽게 이사를 해야 했다. 이번 여름 내가 살던 기숙사에 공사가 예정되어 있으니, 6월 30일부터 9월 초까지 집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다. 하필 박사과정의 운명을 결정할 퀄 시험이 정확히 6월 말과 8월 말 예정되어 있었기에 학교의 통보는 나에게 마치 사망선고 같았다. 일이 안 풀리려고 하니 이런 일까지 생기는구나- 하며 모든 것을 원망하던 때가 있었다.
나의 상황을 설명하는 이메일을 수없이 많이 보내고, 오피스로 찾아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3시간을 조리돌림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진이 다 빠진 채로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 영상 통화를 하며 눈물을 훔치는데, 내가 속상해 우는 모습을 보고 둘은 함께 깔깔-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래, 웃으려면 한참을 웃을 수 있는 그저 그런 해프닝일 수도 있겠다. 몇 년이 지나도 미국 유학 무용담으로 얘기할 수 있는 사건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모든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그 변화가 신기했다. 꼭 다시 집에 온 것 같았다.
결국 며칠 만에 다른 방을 배정받아 이사를 하게 됐다. 이사를 하는 날에는 총 7명이 손을 보태주었다. 기꺼이 도와주는 호의가 고맙고 벅찼다. 급하게 배정받은 방은 큰 창문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 온종일 밝고 따뜻하다. 모든 일들이 불안하게, 급하게, 대책 없이 이루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일들이 정해진 것처럼 진행되었다. 신기했다.
이상하게도 모든 일들이 어떻게든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보다는 별 것 아니라 괜히 머쓱하기도 하다. 배운 것도 많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긍정과 침착을 잃어버리지 말자. 이곳이 아직 낯설다는 이유로, 혼자 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낭비하듯 사용하지 말아야지. 내게 이곳은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닌 데다가, 당장 손을 보태줄 수 있는 사람도 7명이나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