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피라미드가 '전통'? '습관'일 뿐"

'재미없는 뉴스'는 어떻게 신문을 뒤덮었나

by 강펜치

지난 2024년 3월 23일 오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열린 ‘파워 오브 내러티브 콘퍼런스(The Power of Narrative Conference)’를 마무리하는 기조연설자가 등장했다. 연단에 선 인물은 <뉴욕타임스>의 전 편집국장 딘 바케이였다. 현장에서 연설을 듣던 중, 유독 나의 귀를 잡아당긴 그의 발언 일부를 소개하겠다.


"저널리즘과 조직, 그리고 변화에 있어 ‘전통(tradition)’과 ‘습관(habit)’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자들이 지켜야 한다고 믿는 많은 전통들은 사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전통이 아니라, 역피라미드처럼 그저 습관일 뿐입니다.
솔직히 말해, 역피라미드는 말도 안 되는 글쓰기 방식입니다. 그 방식은 어떤 저널리즘적 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술 환경에 대한 ‘타협’으로 만들어진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글을 그렇게 딱딱하게 쓸 필요는 없다. 좀 더 풀어써도 된다’고 말했을 때,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금지’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바케이의 말은 한 가지 질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우리가 ‘저널리즘의 전통’이라고 믿어온 역피라미드 글쓰기는 과연 언제, 어떤 이유로 표준이 되었을까. 사실 신문의 탄생과 동시에 역피라미드 형태의 기사가 지면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스타일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주 거론되는 가설은 19세기 전신의 발명이다. 1845년 새뮤얼 모스가 전신을 발명하면서 뉴스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전달됐다. 하지만 기술적 제약은 여전히 컸고, 통신이 중간에 끊어질 가능성도 상존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기자들은 가장 중요한 정보를 기사 맨 앞에 배치하는 방식, 즉 역피라미드 구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뉴스 전송 비용은 매우 컸다. 특히 미국 남북전쟁 때에는 전장에서 전신선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뉴스부터 먼저 보냈다는 가설도 발견된다. 이는 뉴스 작성 문체의 변화를 촉진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뉴스 조직, 즉 통신사의 탄생을 이끈다.


초기 미국 <AP통신>은 기사는 짧고 간결하게, 전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당파성도 배척한다는 규칙을 내세웠다. 역피라미드 기사의 대원칙인 객관성도 이렇게 확립됐다. 기사에 당파성을 배제해 좀 더 많은 독자들이 뉴스를 보게 하는 것은 상업주의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언론학자 제임스 캐리는 전신과 미국-유럽을 잇는 해저 케이블 통신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Carey, Communication as Culture: Essays on Media and Society, 2009.).


"해당 기술은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문체 중 하나의 근본 구조를 제공했다. 전신은 통신사를 탄생시켰고, 이는 뉴스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통신사는 어느 정파의 신문에서도 쓸 수 있는 ‘객관적’ 뉴스를 생산하도록 강제하면서, 당파적 저널리즘의 전통을 끊어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당한 뒤 그의 죽음을 전하는 소식이 역피라미드 기사의 시작이라는 가설도 있다. 당시 미국의 신문들은 국방장관 에드윈 스탠튼이 뉴욕시 사령관에게 보낸 전보 사본을 지면에 그대로 게재하는 방식으로 링컨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스탠튼의 전보가 기자들이 흔히 작성하는 역피라미드 형태의 기사와 쏙 빼닮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온다.


"오늘 밤 약 오후 9시 30분, 워싱턴 D.C. 포드 극장에서 링컨 대통령이 괴한의 총격을 받았다. 당시 대통령은 부인 링컨 여사, 해리스 부인, 래스번 소령과 함께 개인 관람석에 앉아 있었다. 괴한은 갑자기 관람석으로 들어와 대통령 뒤로 접근한 뒤 총을 발사했다. 범인은 곧바로 큰 단검이나 칼을 휘두르며 무대 위로 뛰어내린 뒤 극장 뒤편으로 도주했다. 총알은 대통령의 머리 뒤쪽에 들어가 거의 관통했다. 상처는 치명적이며, 대통령은 피격 이후 의식을 잃은 채 현재 사망 직전 상태다.
거의 같은 시각, 동일인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한 괴한이 시워드 씨의 숙소에 침입했다. 그는 처방전을 가져왔다고 속여 국무장관의 병실로 안내받았다. 괴한은 즉시 침대로 달려가 가슴을 두세 차례, 얼굴을 두 차례 찔렀다.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기를 바라지만, 치명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제기됐다(하략).”


스탠턴 장관의 전보는 링컨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1865년 4월 14일 밤 워싱턴 D.C.의 포드 극장과 윌리엄 시워드 국무장관의 집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전보에서 극장에 출몰했던 괴한은 존 윌크스였다. 링컨은 윌크스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시워드는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스탠턴 장관의 전보는 오늘날의 속보 기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사건 전개를 가장 중요한 사실, 즉 대통령의 피격부터 정리했다. 독자가 즉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육하원칙을 충실히 따랐다. 대통령의 피격이라는 중대 사건을 신속히 전달해야 했던 조건을 고려하면, 이러한 서술 방식은 효과적인 선택이었다.


문제는 링컨 암살과 같은 국가적 비극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던 방식이, 일상의 정치·사회 문제를 다루는 기사에도 동일하게 요구되기 시작하면서 발생했다. 그 결과 뉴스는 사건의 의미나 맥락보다는 정보의 배열에 집중했다. 독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왜 중요한지’까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와 반복적으로 마주하게 됐다.




2024년 3월 23일 보스턴 대학교에서 열린 ‘파워 오브 내러티브 콘퍼런스(The Power of Narrative Conference)’에서 대담 중인 딘 바케이(오른쪽).


역피라미드 뉴스의 한계는 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형식이 탄생한 역사적 조건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전신이라는 기술적 제약, 당파성을 경계하던 상업 언론의 필요 속에서 만들어진 문체가, 미디어 환경과 독자의 기대가 달라진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형식이 목적이 되고, 수단이었던 구조가 규범으로 고착되면서 뉴스는 점차 독자의 경험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역피라미드 기사가 일상의 보도와 복잡한 사회 문제, 인간의 경험을 다루는 주제까지 지배한 적이 있었다. 이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함께 미국 신문의 위기를 가속화했다. 1960년대 미국 신문의 가장 큰 도전은 영상 매체인 TV와의 경쟁이었다. TV를 통해 베트남 전쟁이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이 실시간으로 전파를 탔다. 반면 신문은 늘 한 발 느릴 수밖에 없었다(Thomas R. Schmidt, Rewriting the Newspaper, 2019, p.16).


무엇보다도 신문 읽기가 무척 따분했고, 재미가 없었다. 보스턴 대학교의 저널리즘 교수 크리스토퍼 데일리는 20세기 중반 미국 신문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부분이 지루했다”(Thomas R. Schmidt, Rewriting the Newspaper, 2019, p.11)고 표현할 정도였다.


뉴스에 스토리텔링을 가미하기 시작한 실험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1960년대부터 이른바 ‘뉴저널리즘(New Journalism)’으로 꽃피기 시작한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대두다. 그렇다면 스토리는 무엇이고, 스토리텔링 기법을 적용한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스토리에 해당하는 우리말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 사상, 심리 따위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드러낸다.(하략)"


톰 울프는 1960년대부터 미국 언론계에서 바람을 일으킨 스토리텔링 기사의 선구자로 꼽힌다. 울프가 1972년 펴낸 저널리즘 선집 <뉴저널리즘>은 별난 저널리스트들에 대해 말한다. 이와 관련된 <뉴요커> 보도에는 ‘소설가처럼 꾸미고 싶어 했던 저널리스트’들이 썼던 4가지 장치가 나와 있다. 그것은 “장면별 구성과 사실적인 대화, (독자가 마치 등장인물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끼는) 3인칭 시점, 장면의 묘사”였다.


울프는 강조한다.


"전통적인 신문 저널리즘과는 달리, 묘사적인 시각에서는 인물의 말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입는 옷, 태도, 식사 방식, 거실 풍경까지도 똑같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기본적인 보도 단위는 더 이상 단편적인 정보, 즉 데이터가 아니라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정교한 산문 기법 대부분이 장면에 의존하기 때문이죠."


울프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스토리텔링 뉴스는 소설의 서사 구조와 본질적으로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이 허구를 전제로 서사 장치를 활용한다면, 스토리텔링 뉴스와 논픽션은 철저한 사실만으로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핵심은 이러한 서사적 장치를 얼마나 정교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기사에 적용해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내느냐다. 뉴스 소비의 즐거움이 바로 이 지점에서 성패가 갈린다.


다시 보스턴대 강단에 섰던 바케이의 연설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저널리즘의 전통’이라 부르며 붙들고 있는 형식은 과연 지켜야 할 가치인가. 역피라미드는 한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더 이상 유일한 해답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스토리텔링은 오래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성실한 선택이 된다.


*이 글을 퇴고하던 중 이메일함에서 흥미로운 메일 하나를 발견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월간지 <신문과방송> 1월호는 재미있는 뉴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뉴스는 살아남기 위해 넷플릭스보다 더 재미있어야 하는 시대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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