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과 재미를 동시에 잡는 뉴스란?
언젠가 회사의 한 선배로부터 전 직장에서 겪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노트북이 보급되기 전, 기자들이 ‘꼬마원고지’에 기사를 쓰던 시절의 일이다. 당시 기자들은 200자 원고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격자 수의 꼬마원고지에 세로쓰기로 원고를 작성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그 선배는 단신 기사 한 편 완성하느라 늘 끙끙거렸다. 그런데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데스크의 ‘빨간펜’ 첨삭이었다. 데스크가 무자비하게 휘두른 빨간펜 공격에 꼬마원고지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듯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절정은 여기서부터다. 어떤 데스크는 형편없는 글에 화를 주체 못 하고 꼬마원고지를 북북 찢어 선배의 얼굴에 뿌렸다고 하는데. 눈처럼 내리는 꼬마원고지 조각이 얼굴에 달라붙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기 딱 좋을 사례일 것이다.
나는 이 일화에서 하나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다. 그렇다면 국내 언론사들은 기자들의 글쓰기에 과연 얼마나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내 경험을 돌아보면, 선배 기자가 수습기자에게 1 대 1로 붙어 글쓰기를 지도하는 도제식 교육이 8~9할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수습기자 교육이나, 스스로 책을 읽으며 익힌 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현실 탓에 국내 언론계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글쓰기가 뿌리내릴 토양은 매우 척박하다. 반면 미국 언론계, 특히 일부 뉴스룸과 저널리즘 교육 현장에서 제도적으로 자리 잡은 ‘글쓰기 코치’의 개념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곳에서 글쓰기 코칭을 체계화한 대표적 인물로는, 저널리즘 교육기관인 포인터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로이 피터 클라크가 가장 먼저 언급된다.
클라크가 언론사에 발을 내딛게 된 계기는 기상천외했다. 그가 29살이었던 1977년 여름 미국 플로리다주의 신문사였던 <세인트피터스버그타임스>-2011년 <템파베이타임스>로 제호 변경-의 유진 C. 패터슨 편집국장이 그를 신문사에 전격 채용했다. 이 신문을 보다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클라크는 당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오번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언론 경험이 1도 없었다.
클라크는 그곳에서 다양한 글쓰기 실험을 진행한다. 특히 그가 <세인트피터스버그타임스>에서 심혈을 기울인 것은 기자들과 스토리텔링의 개념을 공유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역피라미드식 기사 쓰기에 익숙한 기자들이 스토리텔링 기법을 배우려고 하니 내부 반발이 따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자들은 교육의 효용성을 톡톡히 체감했다.
나는 2023년 9월 클라크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높은 완성도의 스토리텔링 기사가 갖춰야할 요소는 무엇인지 질문했다. 그의 대답은 결국 스토리텔링 기사의 정의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톰 울프는 비소설 스토리텔링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취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다음 전통적인 소설 기법, 예를 들어 장면 설정, 대화, 인물 세부 사항, 시간 순서 및 시점의 실험을 책임감 있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순 기사는 정보 전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 형태의 기사는 독자들을 그곳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에게 위험을 피하고 우리가 살아남고 번영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찾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클라크는 <세인트피터스버그타임스> 뉴스룸에서 역피라미드 방식의 스트레이트 기사와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작성된 기사를 비교, 대조하며 기자들에게 차이점을 설명했다. 클라크가 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독자를 뉴스의 현장으로 데려가기 위한 작업이었다.
어느 날 그는 기자들에게 ‘강아지를 구하려던 소년, 기차에 치여 다리 절단’이라는 동일한 헤드라인을 가진 두 개의 기사를 나란히 제시했다(Thomas R. Schmidt, Rewriting the Newspaper, 2019, p.54~55). 첫 번째 기사는 스트레이트 기사였고, 두 번째는 스토리텔링 형태였다. 전통적인 역피라미드 형태의 스트레이트 기사의 경우 처음부터 사건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철로에서 강아지를 구하려다가, 10세 소년이 암트랙 여객 열차 바퀴 아래로 떨어져 무릎 아래로 두 다리를 잃었다.
반면 스토리텔링 형태의 기사는 소설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처럼 배경이 먼저 펼쳐져 있다.
소중한 방학의 마지막 날, 제임스 하퍼와 그의 개 미스티, 그리고 친구 제프 토저가 회색의 금속 철로를 따라 힐스보로 강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현직 기자, 특히 경찰팀에서 각종 사건, 사고를 담당하는 기자라면 기사의 리드 문장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압축해서 말한다. 스토리텔링 버전에서 언급된 ‘소중한 휴가의 마지막 날’이나 피해자 친구들, 심지어 반려견 이름과 철로의 색깔까지 모조리 불필요한 정보다. 그런데 이러한 ‘불필요한 정보’의 나열은 계속 이어진다.
빅 머디 강둑을 탐험하는 톰 소여와 헉 핀처럼, 10살 제임스와 12살 제프, 그리고 다른 많은 아이들은 강을 따라 이어지는 키 큰 풀들 사이의 길을 지도처럼 그렸고, 강둑에 자라는 키 크고 두꺼운 나무들을 타고 올라갔을 것이다.
피해자가 열차에 치어 다리를 잃어버리는 내용은 아홉 번째 문단까지 읽어야 언급된다.
순간의 미끄러짐이었다. 제임스의 다리는 금속 바퀴에 끼였고, 무릎 아래가 완전히 절단됐다.
만약 국내 언론사 기자가 이런 식으로 기사를 썼다고 가정하자. 뉴스의 가치를 따지자면 1단짜리 사건, 사고성 기사다. 그런데 주절주절 배경을 나열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핵심을 기사의 한참 뒤에 배치했다면 어떻게 될까. 기사를 편집하는 데스크의 불호령이 떨어지질 게 불 보듯 뻔하다.
클라크의 판단은 달랐다. 이런 스토리텔링 형태의 기사가 독자들이 더 읽기 좋은 기사라고 강조한다. 어째서일까. 그는 이렇게 썼다.
분명히, 두 번째 버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기사의 핵심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한참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두 소년을 톰 소여와 헉 핀에 비유한 것도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는 타당한 비판이다.
그럼에도 클라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두 번째 버전을 옹호했다.
나는 여러 이유로 두 번째 버전이 더 읽기 쉽다고 생각한다. 1) 핵심 내용이 이미 헤드라인에 있기 때문에 리드 문장에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 2) 스토리텔링 방식은 기사에 더 일관된 구조, 즉 명확한 시작, 중간, 끝을 부여한다. 3)스토리텔링은 독자가 끝까지 기사를 읽도록 이끈다.
다시 말해 사건을 단순히 나열하는 대신 맥락과 감정을 함께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독자가 기사 속 상황을 따라가고 인물에 감정적으로 연결되도록 만든다. 이는 결과적으로 뉴스 소비 방식 자체를 바꾸고, 기존 기사와는 다른 인상을 남긴다는 장점이 있다.
클라크는 제도권 신문사에서 공식적으로 글쓰기 코치 역할을 맡은 가장 초기 세대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미국의 한 신문사에서 글쓰기 코치가 탄생했던 배경에는 신문 업계에 들이닥친 위기의식이 있었다. 1970년대 당시 미국에서 성인 인구는 19% 늘었지만, 신문 발행 부수와 판매량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1976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신문편집자협회(ASNE) 지도자들이 모인 것은 이런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기자들의 글쓰기에서 해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모임에서 리버사이드(캘리포니아) 프레스-엔터프라이즈 편집자인 팀 헤이스는 강변했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문에 글쓰기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못한다면 우리는 신문을 접어야 합니다(Thomas R. Schmidt, Rewriting the Newspaper, 2019, p.47~48).
이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 중 한 명이 클라크를 세인트피터스버그 타임스에 채용했던 패터슨이었다. <워싱턴포스트> 출신의 패터슨은 벤 브래들리가 편집국장일 때 함께 있었다. 지난 2017년에 개봉했던 영화 <더 포스트>에서 톰 행크스가 연기했던, 그 깐깐한 편집국장이 바로 브래들리다.
영화의 내용처럼 브래들리는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베트남 전쟁의 비밀을 폭로하면서 미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그는 또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자진 사임하게 한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를 진두지휘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측면만 보더라도 브래들리는 칼 같은 탐사보도로 유명세를 떨친 언론인이었다.
그러나 브래들리의 또 다른 얼굴, 곧 열정적인 스토리텔링 옹호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스토리텔링의 매력과 효용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언론인이었다. 브래들리가 특히 끌렸던 이야기는 권력과 인간관계, 그리고 그 주변을 떠도는 흥미로운 소문들이었다. 승자와 패자의 서사, 누군가의 성공과 타인의 실패, 개인의 용기와 비극으로 드러나는 인간적 드라마 역시 그의 관심사였다. 브래들리 체제 아래에서 워싱턴포스트 지면에 자리 잡은 ‘스타일(Style)’ 섹션은 이러한 감각이 어떻게 뉴스로 구현됐는지를 잘 보여준다(Thomas R. Schmidt, Rewriting the Newspaper, 2019, p.31).
브래들리와 함께 일했던 패터슨 역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호놀룰루에서 열린 ASNE 총회에 참석한 뒤, 자신의 신문이 훌륭한 글쓰기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기를 바랐다. 고심 끝에 패터슨이 내린 결론은 편집국에 글쓰기 컨설턴트를 두는 일이었다. 결국 글쓰기 코치의 도입에는 브래들리와 패터슨처럼 독자에게 더 흥미로운 뉴스를 전하고자 했던 신문사 간부들의 판단이 크게 작용했던 셈이다.
클라크는 뉴스룸 내에서 다양한 글쓰기를 장려했던 패터슨의 안목과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동료들과 함께 글쓰기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25년 동안 신문 글쓰기는 최상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뉴스 작문의 틀을 깨고 스토리를 전할 기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신문과 같은 전통적 매체는 독자의 시선을 붙잡기가 한층 더 어려워졌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며, 미국 신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클라크 역시 신문이 직면한 첫 번째 위기로 소셜미디어와의 경쟁을 꼽았다.
클라크는 두 번째로 신문의 수익구조 붕괴와 새 비즈니스 모델 구축 실패도 심각한 위협이라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의 신문 신뢰 훼손 시도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게 클라크의 견해다. 기존 언론을 ‘가짜 뉴스’로 낙인찍고, 유튜브에서 보고 싶은 정보만 골라 소비하는 정치적 양극화 현상을 한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은 오늘날에 그 효용성을 상실한 것일까. 클라크는 이를 단호히 부인했다. 분명 과거와는 다른 상황 속에 처해 있지만 그 생명력은 여전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이야기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여전히 예외적인 사례가 있는데,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뉴요커, 월스트리트 저널, 애틀랜틱, 폴리티코 등에서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기자들이 책 형태로 주목할 만한 작업을 수행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공공 미디어와 수많은 팟캐스트에서 스토리텔링이 성장한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참여시키는 데 있어서는 여전히 스토리텔링이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