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뉴스, '인간의 경험'을 제공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손이 스마트폰으로 향한다. 화면을 한 번 훑고 나서야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 밤이 되면 다시 그 화면을 마지막으로 들여다보며 하루를 접는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 조그만 사각형 속에서 보낸다. 정보는 넘치고, 자극적인 콘텐츠는 늘 우리의 눈을 붙잡아놓는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는 점점 더 흐릿해진다.
이런 시대에 신문이, 뉴스가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한 정보 전달만으로는 이미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저널리즘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그 질문의 답을 한 사람에게서 들었다.
조지아대 저널리즘스쿨의 잰 윈번 교수는 40여 년간 미국 언론 현장에서 일한 ‘스토리텔링 편집자’다.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을 졸업한 그녀는 <필라델피아인콰이어러>와 <볼티모어선>, <CNN> 등에서 기자들의 글을 다듬었다. 아울러 <볼티모어선> 재직 시절 리사 폴락 기자의 1997년 퓰리처 수상작을 편집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수많은 탐사·서사 보도의 뒤편에는 언제나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 돕는 편집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윈번 교수를 알게 된 것은 매우 큰 행운이었다. 2023년 8월 미국 애리조나주립대(ASU) 월터크롱카이트 저널리즘스쿨에서 본격적인 연수가 시작됐을 때였다. 이 프로그램의 큐레이터인 줄리아 월러스 교수는 나의 연구 주제를 살펴보더니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월러스 교수는 나에게 반드시 윈번 교수와 접촉해 보라고 권유했다. 윈번 교수와 몇 차례의 이메일 교환 끝에 나는 그해 10월에 그녀와 화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윈번은 나에게 스토리에 대한 간단한 비유를 들었다. 캠프파이어를 둘러싸고 앉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이야기의 시작이며 뉴스가 전하는 스토리 또한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화자의 독특한 경험에다 묘사적인 전개가 이어지면서 모두가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관점을 가진 이야기의 주체가 그 속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윈번은 자신이 1970년대 기자 초년병 시절, 미국 언론계의 이야기꾼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톰 울프와 게이 탈리즈, 존 디디온과 같은 언론인이 개척한 ‘뉴저널리즘’이 꽃피고 있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뉴스 생산을 통해 인간의 복잡한 삶의 여정을 마치 캠프파이어 장소에서 이야기하듯 독자들에게 보여줬다. 윈번이 추구한 보도 방식 역시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윈번은 말했다.
제가 저널리즘스쿨에서 배웠던 모든 것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뉴저널리즘은 진정한 이야기를 전달했죠. 저희는 이러한 뉴저널리즘을 보며 그걸 해보고 싶어 했어요. 제가 미주리주의 작은 신문사에서 일했을 때, 그게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스토리를 입힌 뉴스가 바로 제가 관심을 뒀던 저널리즘이었죠.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뉴스를 제공했으니까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에 그치지 않고 '이것이 왜 중요한가?', '왜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답했죠.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뉴스? 나는 윈번에게 이런 뉴스가 무엇인지 질문했다. 그녀는 이를 잘 보여주는 취재와 편집 경험담을 나에게 들려줬다. 마치 캠프파이어 앞에서 자신이 겪은 독특한 경험을 말하듯이.
그것은 미국 메릴랜드주의 한 농장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 이야기였다. 그곳의 동부 해안은 시골 지역이다.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장소에는 닭고기 판매업체 퍼듀(Perdue)에 닭고기를 공급하는 한 농가가 있었다. 이 농가는 꽤 유명해서 농부는 그의 가족과 함께 광고판에도 실릴 정도였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때 이 농부의 집에서 불이 났다.
화재 중 농부와 아내, 두 아이는 무사히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탈출에 성공한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농부의 자녀 한 명이 여전히 집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농부는 좌고우면 하지 않았다. 화마가 무서운 기세로 집어삼키려는 집으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집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윈번은 이 사건이 당시 지역 사회에서 매우 큰 뉴스였다고 말했다. 당연히 온갖 언론사의 기자들이 사고 현장으로, 경찰서로, 소방서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일부는 유족이 머물고 있는 병원이나, 두 사람의 장례식장을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어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언론의 관심도 썰물 빠져나가듯 수그러들었다.
미주리주 시골에서 자란 윈번은 친척 중에도 농부들이 꽤 있다고 한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농부의 아내가 남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지 호기심이 생겼다. 농부의 아내는 모든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을까? 아니면 남편 없이 계속 아이들을 돌보면서 닭을 기르고 있을까?
농부의 집에 불이 난 이듬해 윈번은 봄까지 기다렸다가 기자를 다시 그곳에 보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게 한 것이다. 기자는 아마도 현장에 도착하기 전 화재로 폐허가 된 농부의 집터를 떠올렸을 것이다.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농부의 가족을 찾기 위해 주민들에게 수소문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을 것 같다.
그러나 기자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농부의 아내는 예전처럼 병아리들을 주문해 키우며 모이를 주고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불타버린 집의 잔해는 말끔히 치워졌고, 그 자리에 새 집이 들어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그 농부의 가족에게 새 농가를 지어줬다는 게 기자의 취재 내용이었다.
참혹했던 화재 현장에 파견된 기자는 더 이상 뉴스가 생산되지 않은 그곳에서 새 이야기를 건져냈다. 그것은 비극 속에서 다시 꽃을 피우는 인간의 회복력에 대한 내용이었다. 게다가 더 이상 농부 가족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언론사도 없으니 취재 경쟁 없이 편안한 환경에서 기사를 작성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윈번의 이야기를 듣고,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올랐다. 시간이 흐른 뒤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연대와 회복의 풍경이야말로 인간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이 현장을 지켜봤던 기자는 소설 속의 천사 미하일처럼 미소 지으며 키보드를 두드리진 않았을까. 그렇다. 이것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뉴스였다.
윈번은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스토리텔링의 또 다른 매력은 긍정적인 인간 본성을 다룰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회복력이나 공동체의 힘 같은 것들이죠. 첫 번째 이야기는 단순히 비극이었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으고, 공동체의 지지를 받은 가족의 회복력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편집자들에게 스토리텔링 방식의 기사 작성을 설득할 때, 일반 뉴스만으로는 인간 경험 전체를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스토리텔링은 이런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윈번은 이런 기사를 일컬어 ‘다시 돌아가는 스토리텔링’, 궁극적으로 ‘슬로우 뉴스’라고 이름 붙였다. 농부 가정의 비극처럼 언론은 짧은 시간 동안 사건 발생과 원인, 피해 규모에만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윈번은 이러한 기사가 끝나는 시점에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녀는 미국에서 종종 발생하는 총기 사건에 비극을 한 사례로 들었다. 사람들은 사건의 끔찍함과 잔혹함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건이 점차 희미해져 간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을 추구하는 기자들은 사건이 벌어진 후에 인물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모두가 속보를 좇아 달려가고 있을 때 진짜 이야기를 쓰려는 기자들은 조금 기다리면서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탐색한다.
사건이 뉴스에서 사라진 후에도 진짜 이야기는 아직 다뤄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뉴스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아직 생각할 시간도 없습니다. 충격에 빠져 즉각 반응하고, 질문에 답하지만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같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사람들은 '이게 뭐였지?' 하며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뉴스가 흘러가 버린 후에도 사람들은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거의 모든 헤드라인이 '종결'에 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들은 경기를 졌다', '화재가 있었고 집이 전소됐다'는 등의 종결적인 내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끝에는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이 새로운 시작이 펼쳐지는 이야기를 되돌아가서 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