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여자가 오랜만에 탄 부산행 KTX는 자유석이었다. 자리가 있으면 있는 대로 앉고 싶은 자리에 앉고, 자리가 없으면 서서 가야 하는 좌석이 자유석이었다. 출발지에서 탔기 때문에 다행히 자리가 있었고, 자리에 앉아 출발하기를 기다리는데 낯선 여자가 옆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여자는 뛰러 온 듯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모르게 여자가 숨 쉬는 박자에 맞춰 숨을 골랐다. 나도 마침 숨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공황장애 증상은 최근 낮이고 밤이고 찾아오곤 했는데, 명치 위에 커다랗고 커다란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면 숨이 차올랐다. 여자보다 더 숨이 차오른 옆자리 여자를 따라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명치 위에 얹혔던 돌덩이는 조금씩 녹아 없어지고 답답하던 가슴도, 차올랐던 숨도 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먹먹한 소리가 들렸다. 물속에 머리끝까지 잠기면 들리는 그 소리. 왼쪽 귀에서 들리는 그 빌어먹을 소리와 비슷한 먹먹한 소리. 여자가 곁눈질로 훔쳐보니 옆 자리 여자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열심히, 누구보다 진심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숨 쉬는 여자*의 몸이 공기로 가득 차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숨 쉬는 여자는 온 힘을 다해 숨 쉬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람, 물속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숨 쉬는 여자가 여자의 손을 잡았다. 숨 쉬는 여자의 손은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 물에서 갓 빠져나온 것처럼. 그런 손으로 여자의 손을 토닥이면서 숨 쉬는 여자가 일렁이는 수면처럼 읊조렸다.
슬픔을 참으면 몸에서 소금이 나요. 짜디 짠 당신의 표정, 일평생 바다의 격렬한 타격에 강타당한 외로운 섬 같은 짐승의 눈빛... 따가운 흐느낌처럼 손 끝에서 소금꽃이 피겠어요.*
여자는 명치께가 간지러웠다. 숨 쉬는 여자의 말처럼 몸 안에 가득 고여 있던 슬픔을 말려 얻은 소금 알갱이들이 손 끝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여자는 가만히 손 끝을 바라보았지만, 소금꽃은 피지 않았다. 그저 손 끝이 조금 간지러울 뿐이었다. 여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기억 중에 어떤 기억은 너무도 아프고 깊어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재생될 때가 있었다. 그렇게 자꾸 재생되면 열화 될 법도 한데 오히려 생생해졌다. 아마도 그때 참았던 슬픔이 소금이 된 모양이라고, 여자는 숨 쉬는 여자에게 작게 속삭였다. 여전히 여자의 손을 꼭 쥔 숨 쉬는 여자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왜 저마다 몸에서 나가고 싶은 눈빛을 가졌을까요.
몸 안에는 슬픔에서 난 소금이 가득 차서 쉴 곳이 없기 때문일 거예요.
여자의 말을 들은 숨 쉬는 여자가 여전히 여자의 손을 쥔 채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여자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은 어둡고, 유리창에는 여자의 얼굴과 숨 쉬는 여자의 숨이 아른거리고 있었고, KTX는 아직도 내달리고 있었다.
숨 쉬는 여자: 슬픔치약 거울크림, 김혜순, 문학과지성사, 초판 8쇄 2023년 10월 20일, 12000원
*「내 안의 소금 원피스」, 「냉수 한 컵」 중 일부 인용, 『슬픔치약 거울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