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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주 May 27. 2017

네번째 CHAEC BAR방문기

섬세하게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들이미는 순간, 이제는 꽤 친숙한 지적인 향이 스며 들어왔다. 훅 들어와서 잔잔히 퍼진다. 그 순간  머리 속에 꽉꽉히 들어차있었던 부산하고 어지러운 상념들이 사라져 버렸다. 요즘 나는 내 삶의 목적지에 대한 휴식없는 고민에 질식 직전이었다. 그 지진하고 너저분한 고민의 잔상들을 마치 선량한 여인이 두 손으로 받아들고 가버렸다. 산뜻하게 싸악 날아갔다.

낯설고, 생경했던 책바 풍경이 꽤 낯익고 익숙한 풍경이 되었음을 느낀다. 처음 가보는 친구네 집처럼 마땅히 앉을 곳을 찾아 헤메던 예전과 다르게 휙 둘러보고 바로 앉을 자리를 정했다. 주문할 때도 부끄러움에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책바 주인 정인성씨였지만, 이제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만난 것 처럼 반갑기도 하다. 하도 인스타를 많이 훔쳐보고 좋아요를 눌러대서 그런가. 나 혼자 절친관계다. 

이번에도 술은 커티삭 하이볼을 시켰다. 쓸데 없는 호기심에 다른 술을 시키고, 마시는 내내 후회하는 것보다 익숙하고 좋아하는 술을 마시는 일이 좋다. 나란 사람은 한 번 좋으면 곧 죽어도 계속 좋아하는 사람인 듯 하다. 학교 앞 스테이크 집은 6년 내내 단골이고, 휴대폰 케이스는  꽃무늬만 사야한다. 친구도, 좋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친구보다 내 자아에 갇힌 이야기라도 흥미롭게 경험해줄 친구를 10번 더 만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나를 좋아하면 된다. 다른 사람 필요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을 햇살 받으며, 스쳐가는 바람 느끼며, 기다리면 된다(사실 허세다. 그랬으면 좋겠다).

내 옆의 여자가 압생트를 주문하는 음성이 들린다. 90%는 싫어하는 술이라고 정인성씨가 다정하게 조언한다. 압생트 주문의 레파토리구나. 이제 책바의 레파토리 파악도 되는 단곈가 싶어 작게 웃음이 나왔다. 부끄러워하는 손님의 기색이 꼭 네 달 전 나를 보는 것 같다. 

나름 책바 방문기를 마움글에서 연재 중이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글을 한 편 써야 한다. 묘한 의무감에 글감이 될 것 들을 샅샅히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냥 즐겁지 만은 않다. "익숙'이라는 키워드를 잡아서 글을 쓸까. 오늘따라 익숙한 것 들이 많이 보이네. 마음을 먹는 순간 키워드에 맞는 경험을 채집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익숙함과 책바의 연결고리를 쥐어짜내야 오늘의 글을 완성할 수 있다. 

오늘도 집에서 들고온 책은 뒷전으로 제쳐두고, 정인성씨의 책장을 뒤적였다. 발견한 책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었다. 그 언젠가 읽기를 시도하다가 10장 읽고 도서관에 반납해버린 책이다.  10장 읽고 던져버린 과거에 대한 부채감, '에리히 프롬'이라는 간지나는 저자,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 오늘의 책바 방문기가 어느 정도 완성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 책을 뽑아 들었다. '사랑'은 나에게 가장 '익숙'한 주제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엮으면 어떻게든 엮이겠지라는 기대가 있었다.  익숙한 것이 제일 소중하다-.뭐 그 쯤 주제를 잡고 쓰면 되지 않을까?


만년필과 노트를 옆에 대기시켜 놓은 채 야심찬 각오로 읽기 시작했다. 명문이 쏟아질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막연하고 뻔한 내용이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은 '분리'가 인간을 수치스럽게 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며, 불안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인간의 많은 행동이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여러 예시를 들어가며 부연하고 설명했다. 솔직히 말해 재미없고 지겨웠다. 누가 그걸 몰라? 그걸 왜 이렇게 속이 갑갑해지는 문체로 쓰냔 말이야. 오늘의 글감에 적합한 건덕지를 찾아야했기에 인내심을 가져보려 했지만 내 내면은 지금은 이 책을 읽을 시기가 아님을 깨닫길 요청했다. 사실 다른 시기에 이 책을 만났다면 크게 감명했을 수도 있다. 억지로 연결선을 만드려니 힘들었던 것이 컷다. 참다 참다가 책을 덮고 책장에 밀어 넣어 버렸다.

'익숙'이란 주제는 오늘 포기해야 하나보다. 새로이 글의 구성을 잡아보려 해도 아무런 번뜩이는 글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계산, 저런 계산을 잡아봤지만 그 계산대로라면 오늘 내가 쓸 글은 어색하고 조악할 게 뻔했다.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다시 읽을 책을 고르러 갔다. 이번에는 대충 손이 가는 책을 골랐다.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별다른 이유없이 끌려서 골랐다. 다만 읽고 싶었을 뿐이다. 사랑의 기술을 고를 이유는 이래저래 많았던 것과 대조된다.

하루키의 수필은 확연하고 쉬웠다. 글의 솔직담백함 때문인지 하루키가 원래부터 알던 사람처럼 입체감있게 다가왔다. 지금 그를 당장 만나도 내가 당신을 꽤 잘 알고 있다는 확신에 찬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글은 자연스럽고도 유유히 내 마음의 강을 흘러갔다.  흘러가다가도 내 뇌리에 소복히 담겼다. 골치아픈 의식적인 해석의 과정, 자꾸 멈칫 거리는 과정이 필요 없는 글읽기에 속이 시원했다. 넘어가는 책장에 신이 났다. 삶의 멀미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이유 모를 글의 변비도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나는 줄곧 글쓰기가 나의 내면을 가꿔주기를 원했다. 또 동시에 가꿔진 내면이 글로 표현되어서 나를 한층 더 빛내주길 원했다. 이상하진 않은 일이다. 자책에 빠질 이유는 아니다. 다만, 계산 잡힌 나의 지난 글에는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삶이 없다. 내 글은 처절하고, 찌질하지 않으려 애쓴다. 고매한 척, 그들을 멀리한 것이, 마치 내가 아닌 척 한 것이 내 글의 모순이고 문제였다. 나의 무의식은 그 모순의 짓거리를 견디지 못했고, 요즘 글은 내게서 점점 멀어졌었다. 글의 변비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내 안의 정신적 고상함을 글이라는 고상한 매체로 근사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깊었다. 내가 이런 숨겨져 있는 진실도 발견할 줄 아는 안목있는 사람이라고. 혹은 삶은 이렇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거라고 훈계하는 어줍잖은 글들을 썼었다. 정신적 허영에서 비롯한 글들이었다. 오늘도 나는 익숙한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는 꼰대같은 말을 늘어놓을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진정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름다운 글이 좋아서. 글을 쓰다 보면 내면이 정리되어서. 순간 순간 흩어지는 내 삶의 장면들을 보관해주는 아카이브 역할을 해줘서. 여러 등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들은 발견하고 규정내리는 순간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 순간 글쓰기가 바로 거북해졌다. 정답은 그냥 글이 쓰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것이다.  "왜 나 사랑해?"라고 묻는 질문에 "모르겠어. 그냥 좋아"라고 담백하게 대답이 나온 순간의 감각처럼.  

이 글을 쓰는 내내 너무 상쾌했다. 허위의식, 정신적 허영을 버린 글쓰기는 너무나 즐겁다. 멋있는 글을 써내기 위해 계산잡고 글감을 수집하는 일을 그만 두면 내 삶과 내 글에 모순을 없앨 수 있다. 자연히 즐기고 그 중에 특히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해나가고, 그 것을 소박하게 드러내는 글쓰기가 좋겠다.  작가 그까이꺼는 되면 되고, 안되면 말지 뭐. 다음 달 책바 방문기는 휴재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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