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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주 May 14. 2017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1편

너는 너무 키가 크다.


1. 

문혁이는 키가 엄청 컸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술집에 있었던 남자들 중 제일 컸을 것이다. 천장에 정수리가 닿지는 않는 지 의심스러웠지만,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기에는 내 키가 너무 모자랐다. 버스에서 내릴 때면 고개를 살짝 숙여서 내리곤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사람들의 우산 꼭지에 찔릴까 항상 긴장한다고 했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들에 농담인 줄 만 알았다. 같은 우산 속을 몇 번 거닐다가 둥글게 펼쳐져 둥둥 떠다니는 수십개의 우산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사실인 것이 실감났다. 

같이 길을 걸을 때면 목이 자꾸 아팠다. 눈맞춤을 하면서 걷고 싶은데, 로퍼나 운동화를 신은 날엔 엄두가 안났다. 11센치 힐을 신어야 문혁이가 지금 나를 보고 웃는지, 무심하게 거리를 돌아보며 걷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문혁이 때문에 산 하이힐이 다섯컬레는 넘을 것이다.

"무슨 꼭 다른 공기를 마시는 것 같아. 위 쪽 공기는 맑아?"
"응. 원아. 바람도 잘 불고 상쾌해."
가볍게 빈정거리는 말에 능청거리는 모습이 나는 사실 야속했다. 나보다 30센치는 족히 큰 네가 내게는 항상 힘겨웠다는 것을 눈치채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래 너는 항상 내게 버거웠다. 

2.

길게 날카로운 눈, 거칠게 잘라 놓은 듯 했지만 잘 어울리는 짧은 머리, 대충 걸친 몸에 잘 맞는 티셔츠와 청바지. 문혁이를 떠올리면 꼭 그런 것들이 생각이 난다. 높은 코에 굵은 얼굴선이지만 쌍커풀 없이 반듯한 눈을 가진 모델 같았달까.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나는 뻔하고 평범한 일반인의 세계지만 문혁이의 세계는 노는 사람들의 노는 세계 같았다. 번잡한 술자리에 전혀 어색해 하지 않는 태도가 있었고, 그 모습에 자연히 클럽도 엄청나게 다녀봤겠지 싶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정말 엄청나게 잘 어울렸었다.

그런 네 모습에 처음부터 나는 너를 믿기 어려웠던 것 같다. 네가 우리집을 바래다 준다며, 나를 따라 왔을 때 부터 경계심이 생겼다.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이렇게 술 마시다가 바래다 준 여자가 내가 몇번째일까. 내가 한 10번째쯤 될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어렵지 않게 연락처를 받아가는 너를 보며 '분명 연락이 오지 않을거야'라고 생각했었다. 그 이후에도 아침마다 연락이 왔지만 호감의 표시로 받아들이기가 겁이 났다. 나 말고 몇 명의 여자에게 이런 연락을 보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가정하고 단정지어 놓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연락은 자주 하지만 엄청난 호감표현을 보이지는 않는다. 밥먹었냐. 잘잤냐가 전부다. 어장이거나 호감은 있지만 표현할 정도로 큰 마음은 아닌거겠지. 역시, 너무 잘생긴 애들은 얼굴값을 한다.

3.

"너만 있으면 나 정말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을 것 같아." 

내 팔을 부여잡고 고백하는 문혁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린다. 짧지 않게 알고 지내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눈은 우는 듯 아닌 듯 빨갛다. 해일같이 밀려오는 감정에 휩쓸려 나갈 것 같다. 이렇게 나를 많이 좋아했단 말이야? 의아한 마음이 들 정도로 너는 그 동안 나에게 표현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 동안 원이 너에 대한 내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싶었어. 내가 너를 얼마나 많이 좋아하는지. 너의 아픔마저 내가 다 감싸안을 만큼인지. 이제 정말 한치의 의심도 남아 있지 않아. 이제서야 겨우 얘기를 꺼내 놓네. 정말 후련하다."

 어제 너와 나는 분명 담담한 일상대화를 나눴었는데. 사랑을 고백하는 오늘의 너는 너무나 낯설다. 격정적인 사랑고백이 내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음에도 내 일인 것 같지 않다.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마음으로, 그 거리감으로 너를 바라볼 뿐이었다.

4.

압도적인 감정에 매료당한 것도 있지만, 사실 너와 연애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 인생에서 너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만큼 잘생긴 애가 이렇게 순정파인데 놓치면 아깝잖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날라리 모델 같이 생긴 내 남자친구는 사실 나를 만나기 전 모태솔로였단다. 딸기 타르트를 잘게 썰어 내 입에 넣어주며 너는 말했다. 작은 내 입을 배려하려고 정말 잘게 잘게 조각낸 것이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말이지. 내 마음에 사랑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느꼈어. 그걸 정말 쏟아줄 상대를 나는 계속 찾았던 것 같아.널 만나기 전의 일이야."

감동을 줄법한 문혁이의 말에 이상하게도 전혀 감동받진 않았다. 하지만 감동받은 척 반응했다. 목소리를 격양시키고 눈빛을 반짝거리게끔 했다. 사랑에 빠지면 눈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데 그거 다 뻥이다. 나는 사랑에 빠진 눈빛도 조절할 수 있다. 내가 했던 말 중에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여자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 점은 틀림없었다.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내 연출된 반응이 과해질 수록 내 심장은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사랑을 줄 상대를 오랫동안 섬세히 기다렸던 것 같은데 왜 하필 나한테 걸렸지? 네 옆에는 너랑 닮은 키크고 모델같은 여자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왜 하필 작고 약한 나를 사랑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너는 수국 한다발을 사왔다. 나와 잘 어울린다며 웃는 너는 꿈을 꾸는듯 행복해보인다. 나는 사실 수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사실 문혁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기도를 메워 숨이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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