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같고, 빙산같은
1.
문혁이는 공학도다. 시험이 잦은 탓에 요즘은 내가 부르면 바로 달려오는 일이 거의 줄었다. 미운 마음에 공부하던 책을 빼앗아 들고 이리저리 휘적거려 보았다. 볼트, 너트가 이렇게 공부할 것이 많았나 싶다. 겨우 나사하나에 공부할 것이 이렇게 많다니. 빼곡히 적혀 있는 수치와 그림과 해석할 수 없는 도표가 어지럽다. 순간 내 앞의 네가 한층 더 낯설어진다. 마냥 날라리 같이 생긴 내 남자친구는 어디로 갔을까?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공학을 공부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가끔 보면 문혁이는 기계같다.
최문혁기계설에 힘이 실리는 또 하나의 증거는 도무지 문혁이는 결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시험기간이 되자마자 완벽하게 시험준비태세에 돌입하고 공부에 빠져있다. 모델같던 옷차림은 편안해졌다. 오늘은 같이 공부할 거라고 만났는데, 정말 공부만 하고 있다. '어. 이게 아닌데.'싶은 마음 한 켠 생긴다. 나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펼치지만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너무 기분이 이상하고, 별로다. 분명 네가 나를 더 좋아하는데 왜 너는 공부에 집중하고 나는 멍때리고 앉아 있는 걸까? 사실 오늘도 같이 공부하자고 멀리서부터 찾아온 건 너인데 말이다.
괜한 심술이 나서 살짝 문혁이의 손을 가져다가 등에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눈치다. 무언가 짜릿하다. 귀까지 빨개지고, 눈은 향하는 데를 찾지 못한다. 나는 다시 안도했다. 갑자기 공부가 잘 된다.
"아까. 너랑 같이 공부하는데 집중이 안되서 죽는 줄 알았어."
뾰로통 하기도 하고, 조금 헤실거리기도 하며 너는 말했다.
"아닌데. 너 공부 엄청 집중해서 잘하던데?"
쪼로록. 5분 만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다 마셔버리고 나는 다시 공부하러 먼저 들어와 버렸다. 이상하게 나는 문혁이의 저런 말들을 믿어주기가 싫다.
2.
"원이 네 남자친구 오늘도 놀러오는 거야?"
"응. 맞아. 시험이 끝나니까 더 자주 오네."
내 친구는 부러움에 가득찬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내 상황이 굉장히 행복한 상황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받는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나는 굉장히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구나 싶다. 갑자기 마음이 들뜬다. 설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기분이라면 문혁이를 곧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찬 기대도 생긴다.
"원아. 나 왔어."
환한 얼굴로 서둘러 오는 너다. 문혁이를 보는 내 친구들의 표정이 홍조를 띈다. 친구들의 들뜬 기분과 행동이 좋으면서 불편하다. 왠지 내가 내 친구들보다 내 남자친구에게 더 설레지 않는 것 같아서다. 매번 학교에 찾아오는 문혁이가 나는 사실 별로 반갑지가 않다. 왠지 위협적이고, 어딘가 부담스럽다. 얼굴은 환히 웃고 있지만 내 내면은 두렵도록 고요하다. 잔뜩 누르고 있던 모순감이 고개를 쳐들고 나를 쿡쿡 찌른다.
나는 너를 언제쯤 좋아하게 될까. 처음엔 시간이 지날수록 문혁이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 나름 굳게 믿었다. 나의 이상한 투정과 휘두름을 다 받아주니 머지 않아 내가 마음을 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연애한지 꽤 된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아직도 너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너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기만 하면 모든게 완벽한데. 아직도 나는 설렘을 담은 네 눈빛이 언제나 부담이다. 나를 향한 끔찍한 꾸짖음이다. 행복한 여자친구를 연기하면서, 나는 기도한다. "어서 제가 문혁이를 좋아하게 해주세요." 그러는 동시에 나는 네가 나에게 차라리 화를 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쁜 여자라고 소리라도 질러줬으면 싶다.
3.
우울함이 나를 덮칠 때면 무언가 억울함에 북받쳐서 문혁이를 잔뜩 미워하게 된다. 다음 날이면 그 미워하는 감정이 화살이 되어 나에게로 향한다. 내가 생각해도 문혁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행복한 가정에 태어나서 사랑받고 자랐고, 그래서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문혁이의 잘못인가. 다 안다. 문제는 나다. 문혁이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내가 모든 문제의 원흉이다. 사실 이 피할 수 없는 팩트가 나를 죽여가고 있다.
너를 맹렬히 미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하고, 결국 너를 밀쳐내지는 못한다. 그런 모순의 구덩이에 빠져 무력히 앉아 있으니 나는 내가 싫어진다. 대체 나는 왜 문혁이랑 사귀는걸까? 미우면 헤어지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어제는 내가 헤어짐을 말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관계가 이상해서 어서 빨리 벗어서 던져 버리고 싶었다. 싸늘하게 굳어버린 문혁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정말 칼같은 남자다. 나 역시 별다른 충격이 없는 것을 보니, 역시 나는 문혁이를 좋아한 것이 아니었나보다.
그런데 혼자가 된 첫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온몸이 떨린다. 숨이 막히고, 질식할 것 같다. 형체 없는 공포가 엄습한다. 벌벌 떠는 손으로 문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전화기를 부여잡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이 번에도 단걸음에 달려왔다. 달려온 네가 어이없어서, 나는 엉엉 울었다. 내 나약함이, 위태로움과 가여움이, 너를 유혹하는 걸까. 차라리 내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4.
"원아. 소개팅할래?"
"무슨 소개팅이야. 남자친구 있잖아. 나."
"너, 걔 안 좋아한다면서. 그럼 괜찮지 않아? 네가 좋아하는 남자 만나야지."
"아니. 그래도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말에 정신이 얼얼하다. 생각지도 못한 친구의 발상이 놀랍다. 한편으로는 새삼 스스로에 놀랬다. 지은이의 제안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 내 자신이 낯설고 묘했다. 문혁이를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문혁이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내 옆에 문혁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역시 어색하다. 조금은 내가 문혁이를 좋아하게 되었나보다.
아주 조금은 마음이 들떠 전화를 걸었다. 지금 문혁이가 당장 달려와주었으면 좋겠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네가 달려 온다면 나는 너에게 마음을 열 것 같다.
"아.. 원아.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나? 나 오늘 동기들이랑 가평왔어. 아.. 어떡하지."
시끌벅적한 주변 소음. 전화 건너편 세계는 흥분의 도가니이다.
"내일 언제 오는데?"
"글쎄... 잘 모르겠네. 지금 좀 애매해가지고..."
"뭐하고 있는 중이야?"
"아.. 다음에 말해줄께 원아. 지금 친구들이 불러가지고.."
"이제 밖에 나와서 전화 안받네 문혁아?"
"아..응 미안. 지금 좀 나가기가 그래."
"응 알았어. 재밌게 놀아."
모든 것에 완벽한 문혁이가 가장 못하는 것은 타이밍 맞추기이다.
"지은아. 나 소개팅 하려구."
5.
멀쑥하게 차려입은 내 앞의 남자는 사실 꽤나 내 취향이다. 웃는 눈매도 선하고, 날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단정한 차림도 그렇다, 걸음거리, 말투 역시 취향이다. 메뉴 선택에서 부터 섬세히 배려하는 행동을 보니, 여자를 잘 아는 남자구나 싶다. 잘 짜여진 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그의 행동에 어색한 완벽함마저 느껴진다. 서툰 행동 한 점 없는 그의 행동에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함께 있는 것이 하나도 부담스럽지가 않아서, 오히려 문혁이와 있는 시간보다 편하다. 진정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진정없이 대해주면 그만이다. 내 남자친구는 그 진정이 너무 거대한 빙산같아서 나를 숨 못쉬게 하지만 말이다. 내 취향이지만 진정없는 남자는 계속해서 보통의 흔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를 기계처럼 늘어놓는다. 그에 맞춰 나도 적당히 대꾸한다. A라는 행동에 A'라는 반응이 정해져있듯 대화는 톱니바퀴 맞물리듯 굴러간다. 별안간 몹시 지루해지고, 무의미해져서 적당히 가려고 일어났는데, 내 앞의 남자의 표정에 절박함 한 점이 등장했다.
"사실 제가 지은이 한테, 원씨 프로필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소개받으려고 먼저 말했었어요."
"아. 그럼 저 남자친구 있는 것 아시겠어요."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 남자.
"네. 그래도 너무 만나보고 싶어서 지은이 한테 부탁했어요. 사실 나오시리라곤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 나오신 것을 보니까 남자친구 분이랑 안좋으신 건지.."
"아니요. 잘 지내요. 제가 여기에 나온 게 이상해 보이시겠지만요."
"아.."
"죄송해요. 저 남자친구 보러가야겠어요."
6.
멀리서 다가오는 문혁이를 보자마자 다시 또 숨이 막힌다. 너는 또 어김없이 빛이 열리듯 환히 웃는다. 어떻게 된건지 내 남자친구는 매번 하나도 감추지 않고, 온전히 드러낸다. 그 모습에, 그 인식에 눈물이 터져나왔다.
"어. 원아. 오늘 힘든 일 있었어? 왜 그래."
"..."
"음.. 생각해봤는데, 네가 수국을 안 좋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내가 못해봤더라고. 네 옷에도, 네 공책에도, 노트북 바탕화면도 다 장미인데. 내가 좀 심했지."
문혁이는 정말 화려한 푸른 장미를 건넸다. 정말로 예쁜 장미꽃다발이다.
"생각해봤는데, 장미도 너랑 정말 어울리는 것 같아."
아. 더이상 참기가 힘들어졌다.
"문혁아. 이러지마."
"응..?"
"나 네 감정이 사실 너무 숨이 막혀. 나 나름 노력해봤는데, 네 마음이 너무 커서 도저히 너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 차라리 처음에 나를 대충 꼬시지 그랬어. 나를 헷갈리게 하고, 홀리게 해서 내가 너를 좋아하게 만들고 나서 고백했으면 좋았잖아. 그럼 내가 이렇게 네 감정에 숨막히지 않아도 되잖아."
말도 안되는 말이다. 쓰레기같은 말이 주제를 모르고 정신나간 듯이 흘러나온다.
"원아. 네가 나 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알고 있어? 그런데 너 어떻게 그래."
"말했잖아. 사랑을 쏟아줄 상대를 엄청 오래 기다렸었다고. 나는 그래서 그런 짓 못해."
"나 오늘 소개팅 했어. 엄청 내 취향이더라. 그렇게 내 취향인 남자 처음 봤어."
문혁이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린다. 기계같고, 빙산같은 문혁이가 무너져 내린다. 처음으로 문혁이와의 동질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