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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주 Jun 07. 2019

제일 비싼 한지

    눈주름이 생기든지 말든지 한껏 눈을 비볐다. 간지러워 죽을 것 같다. 손톱과 손가락의 틈새를 이용해서 살금살금 눈을 긁어내다보면 곧 참을 수 없게 된다. 온 힘을 다해 눈을 비벼대니, 간지러움을 아픔으로 지워낼 수 있었다.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시작하면 열 번은 하는 재채기에, 눈물은 시도 때도 없이 흐른다.갑갑하다 못해 막막한 콧물은 내 일상을 점령했다. 코 풀고 남는 시간에 일상의 일을 하는 격이다. 아득하고 개운치 않은 의식이 제일 문제다. 그래서 할머니의 첫 제사에 이렇게 늦게 도착한 것일 테다.



     문을 열어 들어서니, 이미 다 차려져 있는 제사상이 보인다. 가득 채워진 제사상이 정갈하다. 생전 우리집 제사상에서 본 적이 없는 빨갛고 비싼 도미도 올라와 있다. 아마 우리 엄마의 애정스런 작품일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고모들이 이제야 왔냐는 멀끔한 시선을 보낸다. 맹수보다 무서운 고모들이다. 고개를 돌리자, 엄마는 나를 걱정스레 책망하는 표정이다. 뭐 어쩔 수 없다. 나는 바쁘고 바쁜 사람이니까. 그렇게 꾹 누른다. 늦게 온 만큼 제사 준비를 도와야 하는데, 다 끝나버린 것은 좀 문제다. 면목 없이 자리에 앉았다.



    우리집은 종갓집이고 그 만큼 제사가 많다. 그 많은 제사에, 심지어 할아버지 제사에도 생전 얼굴을 비추는 법이 없던 고모들이 모두 모였다. 교회 다니는 고모들도 오늘은 왔다. 절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리를 지킨다. 당숙들도 모두 자리했다. 작은 당숙은 오늘도 수박을 사왔다. 안 그래도 좁은 우리집이 사람으로 꽉 들어찼다.



    제사가 시작되었다. 큰 당숙은 여느 때와 같이 낭랑하게 축문을 읽었다. 집안의 어른 순서대로 술이 한잔씩 올라간다. 조용하지만 분주한 시간이다. 오래된 병풍에는 하얀 지방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 곳에 검게 한자로 자리한 분들이 여러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다. 평소와 달리 오늘 병풍에 붙은 지방의 수는 짝수다. 고조할아버지 옆에, 고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옆에 증조할머니가 계신다. 기억이 남아 있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홀로 병풍에 자리했던 할아버지 자리 옆에는 경주이씨로 시작하는 지방이 하나 붙어있다. 처음보는 낯선 광경이다. 제사 때 마다 어서 날 데려가라며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호소하시더니, 이제는 당신 뜻대로 되신 거다. 다시금 꽃가루 알레르기가 돈다.



    제사 사이 시간, 흠향 시간에 친척들은 할머니에 대한 칭찬과 미담을 꺼내 놓았다.


"우리 엄마는 진짜 천사였지."


막내고모는 나지막히 운다.


"큰어머니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어."


작은 당숙은 매번 하던 얘기를 오늘도 또 한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분위기에, 모두가 먹먹한 마음이다.


"물에 빠졌을 때 어머니가 살려낸 손주가 누구지?"


일제히 나와 동생에게 시선이 쏟아진다. 그 손주가 나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늦잠을 자느라 당신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운 손녀딸은 말을 집어삼킨다.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인지 계속 콧물이 나요."


나의 괜한 엄살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른들의 알레르기 각종 대처법이 나왔다. 마스크를 써라. 한약을 먹어봐라. 정말 알레르기가 맞냐. 사뭇 가벼운 분위기에 마음이 편해졌다.



    짧은 흠향 시간 뒤에 모두 한 줄로 서 절을 했다. 교회에 다니는 고모들은 작은 방에서 기도를 했다. 모두가 엎드린 그 순간에, 마음이 조용하게 무너져 내렸다. 고개 숙여 절할 때마다 뚝뚝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콧물도 코를 가득 메웠다. 슬픔과 꽃가루 알레르기가 마구 뒤섞여 분간이 안될 지경이었다. 친척들은 한 번 더 알레르기 대처법을 알려주었다.  



    몇차례의 절과 흠향 시간이 지났다. 어머니는 밥을 내놓고, 탕국을 내놓고, 마지막으로 물을 내놓았다. 제사의 마지막에 아버지는 지방을 하나씩 뜯어 라이터로 정성껏 태웠다. 발로 뛰며 직접 구한 전국에서 가장 좋고 제일 비싼 한지라 하였다. 재가 자잘하게 흩날리는 법도 없이 자작하게 타더니, 훌쩍 종이가 하늘로 솟았다. 웃는 낯으로 "우리 어머니, 훨훨 날아가셨네."하고 말하는 아버지가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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