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외삼촌의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와서
첫날에는 아마 다들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멍하거나 조용한 눈물을 훔치긴 했어도 그럭저럭 괜찮아보였다. 둘째날 낮 2시쯔음에 염습 참관실에 들어가는 순간, 다들 통곡했다. 아마도 그동안 실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을 것이다.
스테인리스의 수술대 같은 곳 위에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는 속히 말하면 ‘시체’는 누군가와 35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약 55년 전 가난하고 아득한 어린 시절을 내내 의지하고 붙어 살았던 동생이고 오빠였다. 장례 지도사가 고인의 얼굴을 곱게 닦고 머리를 정돈하기 위한 그 살아있는 힘과 진동은, 그의 몸과 얼굴을 흔들리게 했다. 그 진동은 마치 그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는 지금 죽어 아무런 숨이나 의식 같은 게 있을 리가 전혀 없지만, 그냥 그렇게- 일이 없는 토요일 오후에 달게 낮잠을 자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그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볼 수 없고 연말정산이나 자동차 보험에 대해 논의할 수 없고, 가끔이라도 안부전화를 걸어 어떻게 사느냐고 물을 수도 없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 일가 사람들은 대차게 울기 시작했고 그 울음이 내게로 전염되어 내 눈물 콧물까지 쏙 빼놓았다. 그쪽에서 잡고 있어, 라는 장례지도사의 말 소리, 이렇게요? 하는 어리숙한 보조 도우미의 말소리, 천을 세게 당기는 소리, 매듭 지을 때의 삐그덕 삐그덕 소리, 얼굴을 곱게 닦아낸 천을 버리거나 알맞을 길이의 끈으로 만들기 위해 가위로 잘라내는 사각하는 소리 그 모든 소리와 행동이 들리고 보일 정도로 고요했다. 하지만 평온하지마는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의복을 다 입히고 동여 맨 후에 유족들의 힘으로 입관했다. -시신을 관 속에 넣었다. 상주였던 철이 오빠가 관 위에 고인의 이름 석자를 적었다. 장례 지도사는 자꾸만, 고인을 위해서라도 그만 울라고 말하셨다. 안타깝게도 아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나 지금껏 말 한마디 해본 적 없을 정도로 말이 없고 냉랭한 성격의 서른 세 살 철이 오빠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슬픔의 표현은 지켜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세상의 시선으로 이미 어른이어도 한참 어른인 나이에, 4살 배기 아이가 어린이집에 ‘나 놓고 아빠 혼자서 그 어디도 가지 말아’라며 떼 쓰듯 유리창에 양손을 대고 두드리며 아빠 아빠 목청높여 부르는 그 목매인 소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여웠다. 가족들이 가까이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하는 시간에 ‘이 세상에 통곡, 오열과 같은 단어뿐이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리치며 말했다.
“고생했어 아빠, 고생했어 아빠…. 우리 요즘 사이 가까워졌었잖아…. 내가 사랑한다고 말 안해도, 내가 아빠 사랑하는 거 알지?”
염을 하는 1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힘들었던 철이 오빠는 2층 빈소에 올라가자 마자 분향실 속의 영정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곧바로 묵혀둔 슬픔이 과호흡으로 바뀌었다. 잠시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누워 오랜 시간 숨쉬기를 힘겨워했다.
쭈욱 집안의 장손이었던 오빠는 집안의 관계와 경조사들과 함께 이젠 어머니를 책임질 가장이 되었다. 어른들은 고생하라는 호탕한 토닥임을 주었고 오빠는 감사했다며 인사했고 서로 조금은 무거운 악수를 주고 받으면서, 그때 오빠는 더 어른이 되었겠다. 그 어떤 용기나 변화 같은 것들이 보였다. 평생 우리에게 말 거는 일이 없던 오빠는 헤어질 때 큰집의 맏이인 영아언니와 우리집의 맏이인 언니의 번호를 물어 저장했고 고생이 많았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납골당에 외삼촌을 모시고 모든 절차가 끝난 뒤 장례식장에 돌아가서 상복에서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반납했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장례 지도사님이 하신 말씀은 이랬다.
“우리 아들이 정말 고생 많았어요. 우리 아들이 염하기 전에 사무실에 계속 찾아와서 나 귀찮을 정도로, ‘우리 아빠 예쁘게 해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더이다. 마음고생 정말 많이 했어 우리 아들.”
이런저런 해결해야할 복잡한 일들로 혼이 나갈 정도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버지가 멋진 모습으로 마지막 길을 떠나시기를 바라며 간곡히 부탁했을 철이오빠의 마음이 가련했다.
미망인이 된 외숙모 또한 내게 가까운 분은 아니었으나 집안의 모임에서 본 바로는, 남편인 외삼촌과 아들인 철이 오빠와 성격이 같았다. 왠지 따뜻한 표정이 없고 차가운 표정만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인 철이오빠가 울 때 조차도 겉으로 다가가 위로하지 않는 사람이다. 좀처럼 따뜻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그녀의 통곡이 더욱더 뜨겁게 다가왔다. 나는 왜 차가운 성격의 사람은 그의 슬픔도 차가울 것이라 생각했을까.
외숙모는 때때로 자주 자주 울어두었다. 앞으로 혼자서 살아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때론 인내했고- 때론 견디지 않고 감정을 다 흘려 보내버렸다. 외숙모가 울며 흐느끼는 소리는 너무 슬펐다. 아무런 말도 없이 우는 소리만 내셨고 나는 먼 곳에 앉아 가만히 우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도 자주 자주 울었다. 납골당에서 유골함을 잡고 목소리를 내며 했던 울었던 작별인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여보 나 잘 살게. 나 걱정하지 마. 나 걱정하지 말고 가. 나 잘 살수 있어. 여보, 그리고 내가 미안해.” 하며 우는 그 목소리.
셋째날 아침 일찍, 분향실에서 마지막 절을 드리고 마지막 식사를 하도록 시간을 둔 후에 운구하고 화장을 하러 갔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물을 닦으라고 건내줄 각티슈를 꼬옥 챙기는 일 뿐이었다. 그 각티슈는 1시간 정도 후에 다 써버렸다. 외삼촌이 일하던 사무실에 들렀고 외숙모와 오빠는 점점 더 많이 울었다.
엄마도, 정신을 잃을 듯한 철이오빠를 보고 때때로 크게 흐느꼈다. 엄마는 아마 정말 많이 슬펐을테지만 자주 슬퍼하지는 않았다. 아주 짧게 울고 곧바로 정신을 차리기 마련이다. 그녀의 자녀인 우리 삼남매 앞에서도 언제나 그렇게 강한 사람이었기에, 조카 앞에서도 그렇게 강한 사람이고 싶었으리라. 내 오래지 않은 경험상 깨달은 교훈은 <눈물을 내맘대로 조절하고 없애버릴 수 있는 능력은 정말 정말 정말 어려운 것>인데, 조카를 위로하느라- 혹은 나와 언니가 마음 아파할까봐서- 그녀는 그렇게 어려운 것을 해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려운 일이라도 결국은 해내는 사람이다. 그녀는 엄마이거나 고모이기 전에, 자신의 오빠를 잃은 동생으로써 엉엉 울어도 되는데. 차라리 그렇게 울었으면 좋겠는데.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그치만 나는 책임감이 강한 나의 엄마를 잘 알아서 말 없이 등 뒤로 위로했다. 그리고 엄마를 닮아가고자 나도 슬퍼도 강해지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약한 사람이라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 아빠와 큰외삼촌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날이 새도록 손님들과 소주를 많이 까서 마셨다.
둘째날 낮 염습을 할 때에도 감정을 억누르고 거의 울지 않던 큰외삼촌은 마지막 날 감정이 터져버렸다. 모두 깨끗이 정리하고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마지막 날 아침의 빈소에서, 술에 쩔어 빈소에 대자로 누워 깨워도 잘 일어나지 않고 깨어도 다시 눕는 모습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 가장 손윗사람으로써 모범이 되는 모습만을 보였던 사람이고, 지난 이틀간 밝은 얼굴로 우리에게 농담 혹은 만담을 펼치던 분이셨기에 의아했다. 분향실에서의 장례지도사가 주도하는 마지막 순서가 끝나자 큰외삼촌은 갑자기 깨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우셨다. 좀처럼 깨지 않고 있던 것은 동생을 진짜로 떠나보낼 시간을 영원히 지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라도 안하면 동생이 진짜로 너무나 빨리 떠나는 것만 같아서, 체면 불구하고 입구 쪽 찬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베거나 덮지 않고 그렇게 뻗어 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울음엔 동생이 자신보다 먼저 떠나버린 ‘억울함’과 ‘허망함’이 묻어 있었다. 대체로는 소리 없이 묵묵히 우셨다. 운구하는 모습을 볼 때에도 버스에 타서도 한참을 우셨다. 그동안 참아왔던 슬픔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가장 손윗사람으로써 초장부터 슬퍼하면 다들 그 슬픔을 따라할까봐 그렇게 참으셨나보다. 끝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아지지가 않았나보다. 나도 큰외삼촌처럼 허망하게 따라 울었다. 그날엔 마지막까지 평소의 그답지가 않았다. 전혀 웃거나 농담하지 않았다. 식사를 할 때에도 입을 열지 않으셨고 손님들과 인사를 할 시간에도 그냥 혼자 자꾸만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이틀동안 저장해둔 슬픔을 그날에 다 내보내시느라 눈과 얼굴이 퉁퉁 부으셨다. 화장터의 분향실에서, 터덜터덜 영정사진에 걸어가셔서 어린 동생을 세수시키듯 자신의 눈물을 닦던 휴지로 영정사진을 연신 닦아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큰외삼촌이 괜찮은줄로만 알았다. 나는 왜 울지 않으면 그 사람은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빠는 3일동안 고인의 매제로써 상주인 철이오빠와 둘이 함께 서서 손님들께 맞절할 사람이 없어서, 아빠가 고생을 좀 많이 했다. 장례식장을 방문한 손님들을 맞이하고 배웅하기 위해 분향실에서 서서 제자리를 지키셨고 멀리서 오신 엄마 쪽 일가 친척들에게 살갑게 대해주고 분위기를 풀어줬다. 전날과 전전날 합쳐 4시간도 자지 않았으면서 마지막 날엔 아예 날밤을 새고도 마치 좀비처럼 멀쩡한 컨디션을 보여줬다. 피곤해하기는커녕 슬퍼하는 사람들을 웃게 하려고, 쉴새 없이 실없고 지나친 농담을 쳤다. 핑퐁핑퐁이 되지 않아도- 주책이라며 뭐라고 해도- 멈추지 않고 슬픔을 깨뜨려버리려고 노력했다. 원래라면 그런 행동들을 좋아하지 않고 나무라는 나지만 그날만큼은 아빠가 멋지고 대단스러웠다. 그게 다인 줄로만 알았다.
큰외삼촌이 아이처럼 슬퍼할 때에, 아빠는 처음에는 어깨동무하며 “형님! 애도 아니고 울긴 왜울어~ 자 여기다가 코 흥! 풀어!” 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신의 방식으로 위로하던 아빠도 어느새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아빠는 큰외삼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빠도 나처럼 아빠의 형제를 잃는 생각을 했을까? 눈물을 훔치려 안경을 벗는 뒷모습과 안경이 없는 맨 얼굴 사이에 비친- 서러운 얼굴이 잠깐 보였다. 아빠의 우는 얼굴은 너무 귀해서 조금 놀랐고 나는 또 못난 딸이라 모르는 체 했다. 나도 아빠의 방식대로- 아빠의 까만 상복의 말려 올라간 옷의 매무새를 툭툭 가지런히 하거나 어깨 언저리의 먼지를 툭툭 털어줄 뿐이었다.
작은 외삼촌의 친구들은 장례식장에 술을 마시러 왔나 싶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고 함께 모여 취했다. 밤 늦게까지 몇시간을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화투판을 벌였다. (장례식장에서는 화투를 치는 것이 자리를 지키는 방법 중 하나로 으레 고인과 유족들을 위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한다. : 할머니의 장례식 때 알게된 사실) 나의 철없는 어린 동생은 그 큰 친구 무리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이 다 외삼촌 친구들이야? 우와 외삼촌 인싸다!” 라고 했다. 장례식장을 고요하게 하지 않고 저마다 큰소리로 떠들며 들썩이게 했다. 마지막 발인 날까지 제 자리를 지켜 기다려주셨다. 다들 저마다 슬퍼하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내가 본 몇 명은 이랬다.
친구 A는 엄마에게는 “영숙아, 네가 어릴 때 박대 까던 모습을 알아. 나 알지? 어린 시절의 너희 오빠랑 가장 친한 친구야” 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고등학교 동문 무리와는 다르게 그는 혼자 움직였다. 그는 술에 취해 분향실에 가서 앉아서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 나누듯- 아주 오래 혼자서 얘기했다. 납골당에서 우리 버스가 떠날 때까지 밖에서 외롭게 담배를 깊게 빨아 들이마시며 서툴게 눈물 떨어트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외로움이 느껴져서 나도 외로운 눈물을 흘렸다.
친구 B는 친구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했다. 납골당에 모셔진 유골함에 유족이 인사하기도 전에, 그 고요함이 넘쳐 흘러 정숙해야 하는 차가운 납골당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격분했고 크게 소리 질렀다. 말리는 친구들과 관계자들을 뿌리치고 쳐내면서 울며 악을 쓰며 아주 크게 소리쳤다. “길훈아!! 너 이 새끼야! 이노무 새끼야! 너가 왜 여기 있냐? 응? 너가 왜 여기에 있어 이새꺄! 우리 아직 할 일도 많은데 왜!!! 너가 왜 여기에 있어 이놈아!” 진정하라며 말리며 끌어내도 외침은 계속됐다. 그의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이지만 그래서 그 격분은 진심이었다. 어떤 사회 규율 같은 것을 다 제쳐 둘 만큼,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말을 꼭 해야만 할 정도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겠지. 그 간절함이 느껴저서 나도 간절한 눈물을 흘렸다. 나도 언젠가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만큼 화가 나는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때는 내가 그런 외침을 할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