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설날이 코앞이다. 고향에 가는 사람들은 부산하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가려면 수고가 필요하다. ktx 한 장 끊으려면 아이돌 콘서트 매표, 수강신청할 때 마냥 '광클'해야 한다. 버스도 사정은 비슷하다. 예매하지 못했다면 취소표는 없는지 현장 매표소를 기웃해야 한다. 이마저도 우등은 구하기가 어렵다. 대여섯 시간 불편한 일반 좌석에서 맥반석 오징어처럼 꿈틀대며 간다.
수고를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현실 속 명절 밥상은 드라마와 다르다. 지상파 일일연속극과 비교하면 안 된다. 실제 일반의 가정에서는 어른이 중심을 잡고, 호호하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싸우지 않으면 다행이다. 긴 테이블, 전과 제사용 뭇국 등 행색은 비슷하다. 그런데 주고받는 말과 그 말이 갖는 온도는 드라마 대사와 다르다. 관심 어린 잔소리(잔소리의 뿌리가 관심이 아님은 뒤에서 설명한다)를 듣다보면 "내가 이러려고 광클을 했나" 자괴감이 든다.
내겐 막내 삼촌이 자괴감을 덕담이란 포장지로 씌워주는 사랑꾼이다. 산타클로스도 아닌데 매해 선물을 준다. 그리고 그 선물은 매해 똑같다. "뭐하고 지내냐", "취직은 아직이냐", "요즘은 이쪽이 잘 나간다더라", "그 회사 아는 사람 있는데" 삼촌은 술 한 잔 하고 본인 집으로 돌아가기 전 덕담 꾸러미를 던진다. 나는 오색찬란한 덕담의 향연을 매해 눈뜨고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다. 속에 울화가 치밀어도. 삼촌은 이런 말을 할 때 한 손엔 용돈을 들고 있다.
"그런데 너가 올해 몇 살이지?" 오승환의 돌직구처럼 마지막 질문이 심장을 공격한다. 그와 함께 내 손에는 용돈이 쥐어진다. 몇 살인지, 아직 대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군인인지는 매해 빠지지 않는 질문이다. 멀어지는 그대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알아서 뭐하게) 잘 지내죠", "(할아버지 빽으로 지금 회사 들어간 거 다 알아) 노력 중입니다", "(그 직업이 잘 나간 지는 진즉에 알고) 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왜 알면 붙여주려고?) 나중에 면접 가면 말씀드릴게요" 한참 구시렁 대다보면 그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의 명절은 광복을 맞는다.
일 년에 설과 추석 반례 행사를 치를 때마다 무관심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정확히는 서로에 무관심한 사실을 인정하고 앉는 밥상이다. 내가 삼촌이 직장을 다니며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에 스트레스를 받아 저토록 배가 산만한지 관심이 없듯 삼촌도 내게 무관심한 그런 상황 말이다. 밥상에 다닥다닥 붙어 신체를 맞댄 탓인지 평소 연락도 안하다가 명절이면 관심으로 포장된 덕담이 쏟아진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을 맛인데도 말이다. 서로에 무심함을 인정하자. 진정으로 궁금한 내용을 물어봐 달라. 대화에 마가 껴도 참자. 이러면 적어도 매해 "그런데 너가 올해 몇 살이지?"라고 돌림 노래하는 불상사는 안 벌어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