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만들어내는 신기한 가족(내편 등장)
결혼을 하면서 자취방을 비워야 했다. 미루고 미루다 부동산에 연락하니 벌써 계약기간이 묵시적 갱신되었다고 한다. 이사는 일단 해야겠고, 방은 나가질 않으니 민법의 도움을 받아 퇴거의사를 밝힌 3개월 뒤에 계약을 종료하기로 했다.
신나는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와 살아가다 보니 계약만료일이 다가왔다. 이번엔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부동산과 집주인에 리마인드 연락을 했다.
하지만 결국 보증금을 받지 못했다. 결혼준비 내내 불안하던 시한폭탄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돈을 주기 힘들겠다는 전화를 받은 금요일의 점심시간부터 지옥은 시작되었다.
전세사기가 횡횡한 터라 전세 매물이 빠지지 않는 데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2년 계약도 불가했고 그러다 보니 세입자가 들어오기 힘든 여건이었다.
집주인의 연락을 받자마자 일단 남편에게 전화했고 남편은 부동산을 잘 아시는 시어머니께 전화했다. 그리고 남편과 시어머니가 내게 해준 말은 놀랍도록 동일했다.
“내가 알아볼 테니까 걱정 말아”
하늘이 무너지던 순간에 그 말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나도 나대로 대응을 강구했다. 가까운 변호사님께 전화를 걸어 법적 대응절차를 상담했다. 무슨 말인진 하나도 모르겠는데 일단 받아 적었다. 아무튼 수요일 오전에 임대차등기명령을 접수하고, 목요일 오전에 집주인과 공증사무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른과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시어머니께 연락을 드려야 했다. 카톡만 하던 전화기피증 며느리는 본인이 급한 탓에 늦은 밤에 전화를 드리고 만다. “어머니,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요..” (열 번도 안 만난 사이에 실례라 생각했다 )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소리야, 우린 가족이잖아
집주인과 만나는 당일, 어머니께서 사정이 생겨서 남편 동생네 부부가 함께 해주었다. 이 친절한 부부는 집 앞까지 와서 픽업해 주고,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걸어주어 긴장도 풀어주고, 공증 사무소에도 동석해 주었다. 떼를 지어(?) 앉아있었던 덕분에 좀 더 당당하고 든든할 수 있었다.
아니 든든한 것을 넘어 행복했다. 하룻밤 사이에 내 편이 엄청나게 생긴 거다.
사실 이들 부부와는 더더욱 얼굴 본 적 별로 없고(다섯 번..?) 가족이 된 지도 갓 한 달인데 내게 일어난 일을 함께 걱정해 주고 함께 해준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았다.
먼 타지로 딸을 보내 은근 걱정했을 아빠는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받으며 말씀하셨다. 이제 서울에 네 편이 또 생긴 거라고.
이상하고 신기했다. 사실 내가 남편과 한 건 “결혼식”뿐인데, 하객을 증인으로 성혼을 선언하긴 하나, 의례적 절차로 볼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도 않았기에 더더욱 그렇다. 물론 사실혼이 법적으로 인정되긴 하지만, 난 아직 보증금 문제 때문에 신혼집 전입신고도 안한걸…
법적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심적인 문제가 또 남았다. 일 년 중 평일을 거의 매일 만나는 회사 사람들도 남남인데, 시부모님은 나와의 네 번째 만남을 결혼식장에서 하셨다..! 그러고도 두 번을 만난 뒤, 우린 가족이라며 보증금 문제를 도와주셨다.
비슷한 경험은 본가에 내려가서도 느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도 한 달 반이 지나서야 친정을 방문했다. 여기저기 놀러 다니다 보니 우리 부모님도 남편을 만난 게 이제야 네 번째라는 걸 깨달았다.
네 번밖에 안 본 타인을 딸의 결혼상대란 이유로 가족대우를 한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이상하고 멋졌다.
남편과도 그러하다. 사실 우리가 부부인 것이 아직 실감 나지 않는다. 그러나 몇 번의 극적인 순간엔 이것이 바로 부부인가 싶다.
정말 소중한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 휴일 이른 아침부터 남편이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서울을 횡단했다. 이른 오전부터 늦은 오후까지 5시간을 장례식장에 앉아있었는데, 내내 함께해 준 남편에게 고마웠다.
남편은 사실 몇 번 보지도 않은 사람의 일인데 단순히 내 친구라는 이유로 소중한 휴일 하루를 이렇게 반납한 것이다. 논리의 영역에서 이것이 가당키나 할까.
자리가 자리인 만큼 다른 가까운 친구들도 함께 자리하였고, 그렇게 아픔을 다 함께 나눔으로써 서로 간에 분리되어 있던 경계의 영역이 흐릿해지는게 보였다.
사랑으로 맺어진 비혈연의 가족은 도대체 무엇일까?
부모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자식의 선택에 대한 무한한 지지와 믿음에 기반함을 느꼈다. 그다음으로는 세월이 주는 식견이 만든 사람 보는 눈을 느꼈다.
부부의 입장에서는 각자의 삶이 하나의 무언가로 녹아들어 감을 느꼈다. 함께 장례식장을 다녀온 날, 묵직하고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느꼈는데 이건 사랑일까? 앞으로 나는 너에게 또 어떤 형태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이에 더하여 결혼식이라는 의식에 대하여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혼인을 ‘서약’ 하고 성혼을 ‘성언’ 하며, 타인으로 입장하여 부부로 퇴장하는 그 모든 순서를.
그것이 법률 밖의 세상에서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할 수 있게 만듦을 경험했다.
모든 것이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제출한 법적인 증거와 사실관계의 세계와는 완전히 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