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le Lee Mar 13. 2023

튼살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37.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아내

“나, 분명 어디서 봤는데.”


“뭘요?”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내의 실루엣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약 이십 년 전 대영박물관의 아프리카 전시관에서. 내 팔뚝 정도 되는 크기의 다산을 상징하는 토기. 가슴과 배, 엉덩이가 잔뜩 부풀어 올라있던 바로 그 실루엣이 내 아내와 겹쳐 보인다. 이 이야기를 하자 아내가 큰 소리로 웃는다. 맞아. 그렇네 하고.


아내가 변해간다.


“보여요? 여기. 혹시 임신선이 생긴 걸까?”


튼살 크림을 발라주는 내게 아내가 손가락으로 배꼽 위를 가리키며 묻는다. 붉은 자국의 선이 수직으로 제법 굵게 생긴 것이 보인다. 임신 33주 차. 아내의 몸이 빠르게 변해가면서, 드디어 튼살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임신 32주 차를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아내의 몸은 눈에 띄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내의 배에 크림을 발라주는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매일매일 배가 불러오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어떤 것을 튼살이라고 부르는 건지 몰랐던 나는 울긋불긋 안에서부터 갈라지며 아내의 배에 새겨지는 흔적들을 보며, 대체 왜 다들 튼살 크림이며 튼살 오일을 선물하는 건지 깨달았다. 아무리 크림을, 오일을 발라도 역부족이었다.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아내는 스무 살이었다. 뽀얀 우윳빛에 잡티 하나 없는 꿀피부를 자랑하는 앳된 대학 신입생. 그리고 이제 아내는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이 되었다. 과로와 야근에 지쳐 많이 상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이보다 대여섯 살 정도는 더 어려 보이는 아내였다. 


그러던 아내의 피부에 낯선 자국들이 생기면서, 나는 이제 상황이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눈에 띄게 부른 배는 누가 보아도 만삭의 임산부다. 누가 보아도 아이를 가진 아줌마. 아내는 이제 더 이상 마냥 앳되고 어려 보이는 사람일 수 없게 되었다. 


튼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튼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배꼽 아래에 집중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튼살에 크림을 발라주며 내가 말했다. 아내에게는 완전한 사각지대이기에 내가 말해주기 전에는 아내가 알아채기 힘들 것이다. 


“크림이 잘 안 먹는 느낌이야.”


걱정스러운 나의 말에 아내가 답한다. 


“일단 수분크림을 먼저 바르자.”


수분 크림을 바른 후에 튼살 크림을 발라보면 흡수가 조금 더 잘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아내는 이내 새로운 튜브형 크림을 하나 더 가져오며 말한다. 


“마지막으로 튼살 위에 이걸 한 번 더 발라주세요. 지금까지 바르던 튼살크림은 예방용. 튼살이 생기기 시작했으면 그 위에는 이걸 발라줘야 해요. 이건 치료용.”


아내가 건네준 크림을 받아 든다. 첫 번째는 수분크림. 그다음은 예방용 크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료용 크림. 배 전체와 옆구리에 크림을 바르고, 등 쪽에도 수분크림과 예방용 크림을 바른다. 시간이 지나면 옆구리를 지나 등 쪽 가죽까지 당겨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아이는 그토록 놀랍게 자라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말없이 크림을 바르는 내게 아내가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괜찮아요.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거야.”


다행이지 뭐. 편안한 목소리의 아내. 하지만 나는 안다. 아내의 표정은 밝지 못하다는 것을. 아내에게 촉촉한 동안의 외모는 꽤 자부심이고 자랑이었음을. 아내의 좋은 피부가 얼마나 그녀의 자신감에 보탬이 되어왔는지를. 


엄마가 되어가는 아내


아내의 몸이 변해가고 있다. 배꼽 주변과 같은 약하고 연한 피부부터 거무스름한 착색이 생기기 시작했고, 피부는 건조해졌다. 지금까지 본 적 없던 몸의 형태를 갖게 된 아내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있잖아, 나중에 수유를 하고 나면 가슴이 축 처지게 된대요.”


그래도, 나 계속 예쁘다 해줄 거야? 아내가 물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예전의 탄탄하고 반짝반짝한 그런 모습으로. 그때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내의 질문에는 이런 걱정이 담겨있는 듯했다. 


“괜찮아. 주름이 자글자글해져도.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예쁘다고 말해줄게.”


 두 팔을 가득 벌려 아내를 안고 등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아내는 정말로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아내의 시간이 빨라져 간다.


내가 꿈꿨던 그 삶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서글서글한 그녀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아내가 변해가는 것처럼, 나 또한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함께 서로의 주름지고 나이 드는 모습을 지켜봐 줄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며 몸부림 칠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런 치열한 노화를 기억해 줄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그리고 나의 젊음이 어떤 색으로 빛났는지를. 나와 당신이, 유일하게 기억해 줄 것이다. 


이 사람과 평생 이렇게 살면서 나이 들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결혼했을 때, 내가 꿈꿨던 그 삶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했던 것들을 우리는 떠나보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더 큰 행복을 기대한다. 분명, 우리에게 더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주어질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아내의 부푼 배에 오늘 밤에도 튼살 크림을 바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태교여행을 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