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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Mar 05. 2023

태교여행을 가다.

36. 엄마가 기분 좋으면 그게 태교라는 아내

"우리, 어디 갈까?"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이런저런 일정을 쓰고 지우던 중이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달력을 채우던 칸들이 한 장을 넘기자 눈에 띄게 듬성듬성 공간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여행은 커녕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못한 지 정말 오래되었는데. 


임신 32주 차를 넘겼건만 아내의 체중은 여전히 좀처럼 늘지 않았다. 임신 전 체중에서 고작 4, 5킬로그램 정도가 불었을 뿐. 아이 몸무게와 태반, 양수 무게를 더하면 10킬로그램 정도는 된다고 하던데. 아내는 임신 후 오히려 살이 빠지는 희귀 체질이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살이 빠지고 있는데,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 크기로 치면 같은 주수 아이들과 비교해서 상위 20% 안에 드는 크기란다. 이대로면 태어날 때는 3.6킬로그램을 넘길지도 모른다는데, 불안함은 오롯이 내 몫이다. 아내는 종종걸음으로 재빠르게 걸어 다니고, 본인이 임산부인지 자각은 하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행동도 급하다. 여전히, 불안함은 오롯이 내 몫일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앞으로 단 둘이 여행 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싶어요. 지금 가지 않으면 적어도 앞으로 10년 동안은 단 둘이 여행 가는 건 못하지 않을까?"


나의 말에 아내가 답한다. 그럴까?


앞으로 10년 동안은 하지 못할 단 둘만의 여행


우리는 갑작스러운 여행을 잘하는 편이었다. 금요일 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가 무심코 던진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출발해 부산의 새벽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출을 기다리던 우리였다. 호캉스는 2박 이하로 가는 게 아니라며 이름 있는 호텔들의 스위트룸을 도장 깨기 하듯 연박으로 때려 넣던 간이 부은 커플. 


그런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늘 집과 회사만 오가며 쳇바퀴 돌듯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떨어진 체력 탓도 있을 것이고, 연차가 쌓일수록 회사 업무에서 오는 중압감이 주말까지 잡아먹는 탓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제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절약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컸다. 집을 떠나는 순간 모두 다 돈이니까. 이 돈이면, 이 가격이면. 이런 말이 우리의 일상 속 대화에서 꽤 자주 튀어나오곤 했다. 


하지만 출산을 두 달 앞둔 우리는, 이번만큼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자고 결심했다. 앞으로 10년은 하지 못할 단 둘만의 여행이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태교여행이 뭐예요?


"팀 사람들이 태교여행 잘 다녀오라고 했어요."


아내가 말했다. 아내의 산부인과 진료가 있는 금요일에 맞춰 우리는 연차를 쓰고, 진료가 끝나기 무섭게 예약해 둔 호텔로 향했다. 병원에서 멀지 않은, 서울 중심부에 있는 그럴싸한 부띠크 호텔. 아내의 취향이 물씬 묻어나는 중세 유럽의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유명한 곳이었다. 일상에서 벗어나자 붐비는 금요일 도로도 나쁘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겨울 햇살이 흥겨웠다. 


"그런데 우리 지금 여행이 태교여행인 걸까?"


"글쎄. 근데 대체 태교여행이 뭐예요?"


아내의 물음에 질문으로 답했다. 아내는 골똘히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가 기분 좋은 여행. 엄마가 기분 좋으면 그게 태교지 뭐."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요.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이번 여행 코스는 모두 아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준비했다. 비록 1박 2일의 짧은 도심 호캉스일지라도 출산을 앞두고 이런저런 카드값에 짓눌린 우리에겐 어깨춤이 춰질 법한 사치였다. 


너무도 짧게 느껴졌던 일탈


보통의 여행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1박 2일 여행도 무척이나 짧았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호텔 라운지에서 애프터눈 티세트를 먹으며 우아한 도심의 상류층 역할놀이에 빠졌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단꿈을 꾸었고, 아주 서민적이지만 단 한 번도 먹은 적 없다는 나주곰탕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했다. 디저트로는 근처 유명한 로컬 베이커리의 빵을 사서 숙소로 가져왔고, 호텔 투숙객만 이용할 수 있는 라운지에서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셰익스피어 원서를 꺼내 볼록 솟은 배 위에 올려두고 반쯤 소파에 드러누운 듯한 포즈로 책을 읽는 아내.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간식을 먹으며 잠들기 전까지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았고, 아침에는 호텔 라운지에서 샌드위치와 수프를 먹었다. 숙소 욕조에 따듯한 물을 담아 입욕제를 넣고 몸을 담갔다. 아내는 임산부여서 목욕을 할 수 없다며,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이 웃었고, 많이 생각했으며, 서로를 많이 바라보았다. 늘 보던 아내인데도 어딘가 낯설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 탓인지도 모르고, 장소의 변화 탓인지도 모른다.


아내에게 느껴지는 새로움이 어쩌면 그동안 내가 계속 놓치고 있던 진짜 아내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 속에 묻혀 소홀하게 지나쳐버린 아내의 수많은 변화가 쌓여 지금의 달라진 아내를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그간 나의 무신경함이 아내의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목적에 충실했던 여행


너무도 짧은 1박 2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짐을 풀자 언제 떠나기라도 했었냐는 듯 평소의 주말이 되살아났다. 밥을 안치고 일주일간 쌓인 빨래거리를 세탁기에 넣는다. 식기세척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거실을 채우는, 햇살 좋은 우리의 익숙한 일요일이다. 


"아쉽진 않아요?"


짐 정리를 마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아내에게 물었다.


"좋았어요."


좋았어요. 정말로. 아내가 답한다.


"그래서 아쉬워요. 아쉬운데, 그래서 더 좋아요. 다음을 기대하게 되어서. 이렇게 약간의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이 더 기대되고, 그만큼 더 만족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난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요."


하루만 더 놀다 올까 하는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예정대로 돌아오길 잘한 것 같다는 아내. 아내의 손을 잡자 아내가 어깨에 기대어온다. 고마워요. 정말로 좋았어요. 아내가 말한다. 


다음엔, 셋이서.


우리의 짧고 소박한 태교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화려하게 일 벌이기 좋아하던 우리 커플답지 않은 여행이었다. 소박했고 간결했으며 넘치긴커녕 모자란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그 어떤 여행보다 우리는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쉬었으며, 더없이 만족했다. 


다음에 또 가자. 아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 다음 기회는 한동안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기다리고 기다려 찾아온 우리의 다음 기회는, 분명 셋이 떠나게 될 것이라고. 그곳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른 코스를 밟으며 여행을 하게 되겠지. 


많이 웃을 것이다. 다음 여행에서도,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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