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이는 자기 먹을 복을 타고난다고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아내가 임신 막달에 들어섰다는 말에 회사 동료가 묻는다. 축하한다고. 대단한 것은 해주지 못하더라도 작은 선물 하나는 주고 싶다고.
“글쎄요. 아내에게 물어보고 말씀드릴게요.”
멋쩍은 웃음과 함께 동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고마워요 신경 써줘서. 그가 환한 미소로 답한다. 그의 딸은 이제 두 살 정도가 되었고, 석 달 후에는 둘째 딸을 출산할 예정이다.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출산일이 다가오자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을 보내주었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아이가 없는 친구들은 작은 선물을 보내왔다. 덕분에 조금은 휑하던 아이 방이 물건들로 가득 찼다. 모빌, 장난감, 인형, 아기 옷, 아기 의자, 아기 욕조, 분유제조기. 몇 달 동안 애써 방 하나를 겨우 비워냈는데, 그 방이 다시 짐으로 차는 데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원래 애는 자기 먹을 복을 타고나는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수년 전,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금전적인 이유로 아이를 낳기가 부담스럽다는 나의 말에 대한 어머니의 답이었다.
그때는 이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장 쌓여있는 빚과 이자가 어깨를 짓눌렀다. 아이는커녕 당장 부족한 다음 달 생활비 만으로도 벅찬데 언감생심 아기를 낳겠다는 생각은 가질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아이를 가질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직장도 없이 결혼하신 부모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대학생활을 하며 연애를 하셨고, 졸업과 함께 결혼식을 올리셨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버지는 한동안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가수가 되기 위해 음반을 준비하셨던 아버지는 학과 선배들의 방해로 데뷔부터 난항을 겪고 가수의 꿈을 내려놓으셨다고 했다. 당시에는 예고를 나오고 국내 탑 레벨의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전통파 성악가가 한낱 트로트나 가요를 부르는 가수가 된다는 게 학교와 학과의 ‘수준을 깎아 먹는’ 행위라고 여겼다고. 그리고 우리나라의 클래식 판은 한 사람 한 사람 속속들이 다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좁았다고. 아버지의 음반은 몽둥이를 들고 찾아온 선배들에 의해 대부분 상점에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박살이 났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세 개의 자랑스러운 직업을 가지고 누나와 나를 훌륭히 키우셨지만, 그 과정은 꽤나 순탄치 못했다. 직업도 돈도 없었던 부모님은 할머니댁에 들어가 신혼생활을 했고, 어머니는 수년간의 시집살이를 견디셨다. 누나가 태어났을 무렵에서야 아버지는 자동차 딜러를 거쳐 경기도의 어느 사립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이 되어 처음으로 고정적인 수입을 집에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누나가 태어나고 얼마 후, 부모님은 본가에서 나와 독립했다. 말이 독립이지, 사실 시댁에서 나와 처가의 보살핌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울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아파트에는 어머니의 언니 내외가 살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일을 하고 계셨기에 빈집을 관리한다는 명목이었다. 누나가 태어났을 무렵, 아파트를 관리하던 이모 내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덩그러니 빈 그 아파트에 부모님이 들어가셨다. 누군가는 빈 집을 관리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외할아버지의 부탁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무일푼에 아이까지 가지게 된 부모님을 돕기 위한 외할아버지의 배려였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월급보다 아파트 관리비가 더 나오는 곳에서,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누나와 나를 키우실 수 있었다고. 그 사이 아버지는 학교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고, 주말에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지휘를 하셨다. 그리고 가끔 케이블 방송의 정기 음악프로그램 MC를 맡아 진행도 하게 되었다.
넘치지는 않았지만 부족하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교사 월급이야 뻔한 수준이라, 생활이 대단히 유복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아쉽지도 않았다. 중간에 한 번 아버지가 친척의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그동안 알뜰살뜰 모았던 큰돈이 날아가는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집이 무너지는 수준으로 몰락하지도 않았다. 근면성실했던 아버지와 알뜰했던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 명의로 된 아파트를 한 채 마련하셨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안정적으로 생활을 이어나갔다. 내가 살면서 크게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모든 순간에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의 도움이 있었고, 어머니는 그걸 내 복이라 하셨다.
삶에서 큰돈이 드는 순간들이 생길 때면,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이 왔다. 내가 대학을 들어갔을 때, 나의 입학금은 외할머니가 내주셨다고 한다. 내가 미국에 공부를 하러 갔을 때, 미국에 자리 잡은 이모는 주말마다 나를 불러 식당 일을 돕게 하셨다. 그리고 쥐어주셨던 아르바이트비로, 나는 미국에서의 생활비를 거의 다 충당할 수 있었다.
통장에 찍힌 의외의 숫자
“이게 웬 돈이에요?”
통장 정리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늘어난 잔고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입금자 명에 어머니 이름 석자가 찍혀있었다.
“들어갈 돈이 생각보다 많지?”
많이 했어. 이 정도면 생색내도 되지? 서희 맛있는 거 많이 사줘.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야. 아무리 없고 힘들어도 해야 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너도 주변에 도움을 줘야 할 때 아낄 생각 말고 잘 도우면서 살아야 해. 그래야 힘든 시기도 같이 이겨내고 넘어설 수 있는 거야.”
우리 가족이 힘들 때 주변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없는 살림에도 베풀어야 할 때를 놓치지 않고 진심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일주일 후, 우리의 통장은 다시 한번 갑작스럽게 늘어난 것을 확인했다. 이번엔 장모님이었다. 결혼할 때 아무것도 해주지 않겠노라, 결혼은 원래 성인으로서 독립하는 것이고 성인이라면 응당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해야 하는 것인데 부모의 도움을 바라서는 안 된다던 장인어른도 이번에는 흔쾌히 지갑을 여셨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어머니가 보내주신 금액과 같은 금액이 늘어났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로 한다.
원래 아이는 자기 먹을 복을 타고난다고. 어머니의 말씀은, 어쩌면 아이가 태어날 때 도와줄 테니 너무 혼자 걱정하지 말라는 어머니 식 격려와 위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도움을 건네줄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아이가 당장 배를 곯을 일은 없을 듯하다고. 참 다행이라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고. 그렇기에 나는 받은 만큼 소중히 주변을 돌아보기로 한다. 좋은 일을 축하하고 좋지 못한 일을 위로하는데 정성을 들이기로.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모든 걸 혼자 짊어지고 해결하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도 파도가 크니까. 그래서 나의 파도를 넘는데 도움을 받았듯이, 나의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의 파도를 넘기는 데에 나의 힘도 보태기로.
그리고 언젠가 우리 아이가 살아가며 파도를 넘을 때, 혼자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