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마지막 진료를 마쳤다.
태동검사를 포함한 마지막 진료는 평소보다 조금 길었다. 아이가 많이 움직이지 않으면 몇 시간도 걸릴 수 있다고 했다.
"보호자 분은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아내를 따라 검사실에 들어가려던 나를 간호사가 막아선다. 다른 산모들이 불편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멋쩍게 검사실에서 발을 돌려 태동검사실 앞 벤치에 앉는다. 커다란 창밖으로 호수가 보인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석촌호수. 봄이 오고 있다. 임신 소식을 들었던 것이 여름이었는데, 가을과 겨울을 건너 어느새 봄이 오고 있었다.
꼬물이는 여전히 잘 놀았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남들보다 조금 빨리 태동검사를 마치고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양수도 정상이고 머리크기나 몸통 둘레도 보통이네요. 심박수는 140 정도로 이렇게 빨리 뛰는 게 정상이고, 몸무게는 3.2킬로그램 정도 되었고요. 다 괜찮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마치고 의사가 이야기한다. 주수보다 2, 3주 정도 더 발육이 빨랐던 꼬물이는 38주부터 성장 속도를 늦추더니 39주가 되자 거의 평균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머리가 너무 커서 태어날 때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건지.
다행히 아내는 임신 막달에 들어선 후에도 좋은 상태를 유지했다. 임당도 없고 태동검사도 무난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몸무게가 너무 늘지 않았다는 것. 아이 무게에 양수와 태반, 그리고 늘어난 혈액 양까지 감안하면 12킬로그램 정도는 늘어나는 게 보통이라고 하는데, 아내의 몸무게는 임신 전에 비해 고작 6킬로그램 정도 늘어난 것이 전부였다. 실제로는 6킬로그램 정도가 줄어든 셈이니, 이러다간 아내가 임신 다이어트 책이라도 쓰겠다 할 판이다.
“이제 예정일까지 일주일 남았어요.”
달력을 보며 의사가 말한다.
“일단 일주일 후에 진료를 한 번 더 잡을게요. 마지막 진료예요. 이 전에라도 소식이 있으면 바로 병원에 연락을 주시고 오시면 돼요. 24시간 대응해 드리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평소에 상당히 건조하던 의사의 말투였는데, 오늘은 뭔가 촉촉한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다음 진료까지도 소식이 없을 수도 있어요. 일단은 자연스럽게 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볼 건데,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도 없으니 계속 소식이 없으면 24일에는 유도분만을 하는 것으로 할게요.”
혹시 뭐 궁금한 것 있으신가요? 의사의 물음에 아내가 답한다.
“소식이라고 하면, 이슬이 비치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세 가지가 있어요. 양수가 줄줄 새어 나온다던가, 진통이 시작된다던가, 아니면 피가 많이 묻어 나온다던가. 이런 증상이 있으면 병원으로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마지막 검사가 끝났다.
병원에서 나오니 점심때가 되었고, 아내는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나보다는 당신을 좀 더 닮았나 봐.”
음식점을 향해 걸으며 던진 나의 말에 아내가 묻는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난 예정일보다 좀 빨리 나온 편이잖아요. 반대로 당신은 많이 늦게 나온 편이었고.”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나는 예정일보다 2주가량 빨리 태어났다고 한다. 반면 아내는 예정일보다 일주일 가량 늦은 편이었다. 그마저도 더 둘 수 없어 유도분만을 했다고. 뱃속에서 이미 너무 커버려서 장모님이 엄청나게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간호사는 배를 누르고 의사는 집게 같은 것으로 머리를 집어 밭에서 무 뽑아내듯 그렇게 낳았다고. 그때의 집게 자국은 평소엔 보이지 않다가, 술을 마시거나 흥분해서 얼굴이 빨갛게 물들면 유독 그 자리만 더 붉게 물들곤 했다.
“날 닮았으면 좋겠어요?”
아내의 물음에 내가 답한다.
“응. 나보단 당신을 더 닮았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나보다 오빠를 더 닮았으면 하는 부분은 없어요?”
아내의 질문에 딱 하나 답이 떠오른다. 시력. 아내는 어려서부터 시력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더 악화되어 거의 육십 대 정도의 시력이라고.
“맞아. 시력은 오빠를 닮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팔다리 긴 것도.”
하지만 피부는 꼭 날 닮았으면 좋겠어요.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 아내의 꿀피부는 특별하다. 사춘기 시절부터 30대가 되어서까지도 얼굴 가득 화농성 여드름으로 범벅이 되었던 나와는 다르다. 하물며 딸인데, 피부는 꼭 아내를 닮았으면.
“믿겨요? 다음 주가 되면, 이 차에 셋이 타고 있을 거예요.”
아내의 말에 나는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공기의 무게가 바뀌는 느낌. 불과 일주일 후면, 저 뒷좌석에 설치한 카시트에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연약하게 버둥대는 아이가 실려있을 것이다. 나와, 당신의 딸이다.
다음 주에는 제가 없을 겁니다.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나흘 뒤, 나는 주간 리더 회의에 들어가 대표이사와 임원들이 모두 자리한 곳에서 인사팀 업무보고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 중에 아내가 출산을 할 예정이라 출산휴가를 쓸 예정입니다. 다음주가 되면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잘라서 쓰는 쪽으로 조치하겠습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그런 표정으로 잠시 멍 때리던 대표와 임원들이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박수를 쳐주고, 또 누군가는 내 등을 두드렸다. 그렇다. 이젠 정말 언제 병원으로 달려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때가 되었다.
다음 주에, 나는 아빠가 된다.
다음 주에 나는 아빠가 된다. 드디어, 나는 정말로 아빠가 되는 것이다.
처음 아내와 아이를 갖겠다고 결정을 내렸을 때부터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하고 아이를 갖기 위해 시도했던 모든 순간들. 아내가 내 눈앞에 두 줄이 선명하게 찍힌 테스트기를 보여주던 그 새벽. 초음파로 아이의 심장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 꼬물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민하던 깊고 고요했던 밤. 처음으로 꼬물이의 태동을 느꼈던 순간. 지난 39주의 시간은 무척이나 짧고, 무척이나 길었으며, 삶의 그 어느 기간보다도 풍성하게 느껴졌다. 참 많은 일이 있었고, 또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생각한다. 나는 정말로, 다음 주가 되면
아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