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양수가 터진 것 같아요.”
아내가 말했다. 화장실 앞 바닥부터 안방까지 물방울이 군데군데 떨어진 것이 보였다.
“이슬이 비친 건지 아니면 양수가 터진 건지 조금 헷갈리는데, 물 양이 너무 많아서 양수가 아닌가 싶어요.”
아내는 차분하려 노력했지만 두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병원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분비물이 좀 많이 나온 것일 수도 있으니 한 시간 정도 지켜보세요. 그래도 계속 나오면 양수이니 저희에게 연락 주시고 병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한껏 긴장하고 흥분한 아내와 다르게 간호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침착했다. 늘 분만의 순간을 마주하는 사람이니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전문가다. 그런 전문가의 차분한 목소리는 나를 안심시키는 힘이 되었다. 괜찮다. 침착하게, 이제 뭘 하면 좋을까.
“어쩌지. 계속 많이 나오는데….”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를 마주한 아내는 함께했던 지난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출산의 순간이 왔을 때를 대비해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짐을 풀고 싸기를 반복했던 아내였는데. 그렇게 열심히 대비하고 또 대비했는데.
“아무래도 양수가 맞는 것 같아요. 1시간 까지 기다릴 것 없어요. 바로 준비하고 출발하자.”
15분 정도가 지났을 때, 아내는 세 번째 대용량 생리대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이 정도 양이 단순한 이슬이나 분비물일리 없다.
양수가 터졌다.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마도 오늘 밤 잠은 사치일 거란 생각에 커피도 한 잔 가득 텀블러에 내렸다. 아내는 옷을 갈아입다 말고 가습기 통을 비워야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며, 냉장고에 오래된 반찬들을 미리 버려두어야 한다며 자꾸만 손에 일거리를 잡았다.
“내가 할게. 진정해요.”
분주한 아내를 멈춰 세우고 손을 잡아 품에 안았다. 어깨를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진정해.
“우리 준비 다 됐어요. 이제 남은 건 내가 할게. 당신은 옷 마저 다 갈아입고 앉아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나한테 시킬 거 있으면 말하고.”
오랫동안 집을 비울 것을 생각해 가전기기의 전원을 내리고 가습기 통을 비웠다. 산후조리원에서 쓸 짐과 출산가방은 이미 차에 실려있다. 꼬물이가 태어났을 때 찍을 카메라와 액션캠, 그리고 급한 회사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노트북을 가방에 챙겨 넣었고, 마지막으로 내 세면도구를 챙겨 넣었다.
이제는 진짜 병원으로 출발하면 된다. 아내는 전화로 양가 부모님께 병원으로 간다는 것을 알렸다. 수화기 너머로 두 어머니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시간관념이 딱 제 엄마를 닮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나서는 순간 내비게이션이 말한다. 지금 시간은 열 두시입니다.
“시간관념이 딱 제 엄마네.”
아내에게는 약간의 편집증 같은 버릇이 있다. 깔끔하게 딱 떨어지도록 만드는 버릇. 선이나 색, 패턴이 어긋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숫자도 마찬가지다. 딱 떨어지는 숫자를 좋아하는 아내. 그런 제 엄마를 닮았는지, 꼬물이는 처음 초음파를 찍었을 때 의사 선생님이 이야기했던 예정일에 정확히 맞춰 세상에 나올 준비를 했다. 임신기간 40주 0일. 엄청나다.
“그래서 그런가? 태어나는 것도 당신 생일에 딱 맞추려나 봐.”
아무리 분만이 길어도 보통은 만 하루를 넘기지는 않을 테니, 꼬물이가 태어나는 것은 오늘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나보다는 아내를 닮았으면 하는 나의 바람을 신이 들어준 것인지.
“하루 이틀 차이 날 거면 차라리 같은 날이었으면 했는데, 우리 꼬물이가 효녀네. 엄마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그렇죠?”
그러게. 내가 답한다. 꼬물이는 참 효녀가 맞다. 아빠 힘들게 월요일에 출근했다가 병원으로 뛰어올 필요 없이, 주말 다 편안하게 쉬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이렇게 나오겠다고 신호를 주다니. 이런 효녀가 또 있을까. 이런 효녀이니, 엄마를 너무 아프게 하진 않겠지?
이런 경우도 많아요.
병원에 도착한 것은 12시 30분이 조금 넘어서였다. 주말이 끝난 새벽의 도로는 신비로울 정도로 한산했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가겠다는 마음과 달리 액셀에 자꾸만 발이 올라갔다. 수원에서 잠실까지 한적한 도로 위를 구름을 밟듯 잽싸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