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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05. 2017

스펙의 덫, 자유로울 수 없을까?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여름 방학에 계곡으로 1박 2일 MT를 가자는 과대표의 제안에 친구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한데, 방학 동안 영어학원 등록했거든. 이번 학기에는 꼭 토익 점수를 따놔야 해서.”


“미안, 이번 방학에 인턴 시작하거든. 아마 힘들 것 같아.”


“중요한 공모전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이 한 친구가 물었다.

“넌 방학 동안 뭐 다른 계획 없어? 슬슬 취업 준비해야 하잖아.”


그렇다. 다들 현실로 다가온 취업의 문턱을 넘기 위해 치열하게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책 없이 놀 궁리만 하던 나는 친구들의 변화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느새 내 나이가 그럴 때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친구들과 달리 나는 바로 취업 시장을 두들기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가는 대신 대학원 석사 과정을 등록했다. 아직은 좀 더 내가 하고 싶은걸 하고 싶다. 그리고 차분하게 나의 길을 찾아내고 싶다는 낭만이 있었다. 그 결과는 냉혹한 현실로 이어졌다. 첫 직장에 발을 들였을 때, 나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 되어 있었다. 부서에는 이미 나보다 나이가 어린 직장 선배가 셋이나 있었다.


나이 서른둘의 늦깎이 신입사원. 그 문을 뚫기 위해 걸었던 길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토익 점수를 따고, 어학 스피킹 점수를 따고, 지원 직무와 관련된 자격증을 알아보았다. 일찍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은 인턴, 봉사활동, 공모전, 대외활동 등 모두가 ‘도움이 된다고 인정하는’ 경력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이력서를 가지고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내가 그들 만큼의 이력서를 만들어내기란 어려웠다. 그때 느꼈던 좌절감은 여전히 잊기 힘든 경험이다.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의아했다. 분명 주변에 나보다 더 어리고, 더 좋은 스펙을 자랑하는 지원자가 많았을 텐데.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그들과 비교해 보잘것없는 나 같은 지원자가 어떻게 최종 합격을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은 채용 업무를 맡게 되면서 오래지 않아 풀렸다. 회사 바깥에서 보는 것만큼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뭐야, 그럼 그동안 내가 준비했던 것들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건가? 내가 지금까지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은 어떻게 되는 거야?’라고 억울해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학창 시절의 이력 사항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각종 대외활동과 공모전 시상내용, 그리고 봉사활동과 인턴경험, 어학성적과 학점 모두 지원자를 어필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만, 이런 스펙이 합격의 당락을 가르는 절대기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이력사항과 경험의 방향성이다.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처음 취업을 준비하는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이 가진 이력사항과 프로젝트 경험을 이력서에 모두 때려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넣기 위해 과거 행적을 탈탈 털어가며 먹힐만한 ‘아이템’을 찾았다. 하지만 채용을 하는 입장에서 바라본 이력서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그런 화려한 이력들 중에 정말 의미 있는 것들은 찾아내기 어렵다. 


한 지원자를 예로 들어보자. 개발 직무에 지원한 지원자라고 치자. 경력자들도 울고 갈 정도로 이력서가 빼곡히 차있는 지원자다. 서울 중위권 대학에 학점 4.0의 컴퓨터 공학과 출신.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운전면허 자격증, 한자 3급 자격증, 토익 만점 이상에 토익스피킹 7 레벨. 마케팅 공모전 수상 경력 2회에 개발직 프리랜서 경력 6개월, 기업 SNS 홍보페이지 운영 서포터 경력 3개월, 토익학원 강사 경력 6개월의 경력사항이 이력서에 적혀있다. 


이 지원자가 개발 직무에 지원하면서 이 모든 경력사항을 적어 넣는다. 그러면 평가자는 혼란스럽다. 이 사람은 과연 개발자가 되고 싶은 것인가, 마케터가 되고 싶은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학원 강사가 되고 싶은 것인가?


이력서도 하나의 메시지다.


이력서도 하나의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지원하는 분야와 전혀 관계없는 이력사항은 평가자를 헷갈리게 만들 뿐이다. 위와 같은 이력서를 마주했을 때, 평가자의 귀에는 이런 환청이 들리게 된다.


“저는 개발 쪽으로 지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학과도 컴퓨터 공학과로 지원했고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해서 학점 평점 4.0을 받았어요. 그리고 개발 직무 프리랜서로 일한 경험도 있지요. 그런데 제가 재능이 많아서 마케팅 수상 경력도 있고 마케팅 서포터로 기업에서 일한 경험도 있어요. 게다가 영어 실력도 뛰어나서 토익학원 강사를 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어요. 아마 마케터나 토익학원 강사로 일을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정도는 될 겁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개발 쪽으로 일을 하고 싶어요. 그냥 그렇다고요.”


삐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채용 평가자는 지원자의 이력사항을 통해 지원자가 이 직무를 정말 하고 싶어서 지원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지원 요건에 해당하기 때문에 시험 삼아 한 번 밀어 넣어 본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기껏 채용을 했는데, “제 적성과 맞지 않네요. 아무래도 다른 직무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사직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정말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회사는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정말 그 직무와 회사에 열정이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을 지상과제로 꼽는다.


이 지원자의 경우 마케팅 수상경력이나 마케터 경력, 그리고 토익강사 경력은 사족일 뿐이다. 아니, 사족일 뿐 아니라 오히려 메시지를 헤치는 이력이 된다. 정말 개발자로서의 자질을 어필하고 싶다면 개발 직무에 해당하는 이력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랬을 때 이 지원자의 업무에 대한 진정성과 진로에 확신이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굳이 이 직무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텐데, 왜 이 직무를 지원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결코 스펙의 양이 중요하지 않다.


남들이 다 가지는 스펙이기 때문에, 혹은 남들이 중요하다고 해서 준비하는 스펙은 진짜 스펙이 아니다. 채용은 노트북을 살 때 성능점검표에 기재된 스펙을 비교하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발자에게 한자 자격증이나 운전면허가 중요할까? 반대로 재무회계팀 직원에게 마케팅 공모전 수상경력이 중요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직무 수행에 필요하지 않은 스펙을 쌓기 위해 투입되는 시간과 노력은 헛발질에 가깝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해외에 진출할 계획이 없는 한 회사가 있다. 이 회사에 영업으로 지원을 한 지원자가 있다고 치자. 이 지원자는 이력 사항에 자신의 높은 어학 성적을 적어 넣고 자기소개서에서 자신을 ‘글로벌 인재’라고 소개한다. 평가자는 이 지원자를 보면서 어떻게 생각할까? 과연 이 직원이 이 정도의 외국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국내 영업 업무만으로 만족하며 일할 것이라고 생각할까? ‘글로벌 영업을 하는 회사로 이직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은 지원자’라고 판단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나만의 것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들이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따내기 위해 노력하지 말자. 오히려 다른 수많은 지원자들과 비슷한 이력서가 되어 ‘공장에서 찍어낸 클론 같은’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런 스펙을 쌓기 위한 노력과 시간을 ‘나만의 스토리’에 투자하길 바란다. 남들과 비슷하다는 것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내가 원하는 직무와 관련된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자. 스펙으로 남지 않아도 좋다. 당신에게는 자기소개서에서 이야기를 펼칠 기회가 있다. 일견 초라해 보이는 이력서라도, 자기소개서와 함께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순간, 당신의 이력서는 빛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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