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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Aug 21. 2023

지쳐도 출근

 5시 50분. 곧 있으면 퇴근이다. 조금만 더 일하면 집에 갈 수 있어. 6시 30분. 땡. 컴퓨터를 끄고 기사를 살피며 지하철을 탔다. 점점 집과 가까워졌는데,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누워 하루를 낭비하고 싶단 생각뿐이었는데. 집 앞에서 발을 돌렸다. 목적지가 없었기에 걸을 때마다 목적지가 바뀌었다. 맛있는 걸 먹어볼까? 책을 구매해 볼까? 소품샵에서 예쁜 걸 살까? 그냥 산책만 해도 되는 건데도 목적지를 정하려 했다. 명쾌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 목적 없이 길을 걸었고 문득 생각난 곳을 찾아다녔다. 새로 생긴 식당은 정기휴무였고 서점은 마감 시간이 지났으며 소품샵까지는 가기 귀찮았다.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발걸음을 향할 때 tvN <스페인 하숙>이 생각났다. 늦은 저녁에 피곤한 얼굴로 하숙집 문을 두들기는 외국인이. 많이 지쳐 보였다. 자세한 사연을 들려주지 않았으니 내가 경험한 세상으로 그를 바라봤다. 깊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는데 눈물이 났다. 그에게 밥을 주기 위해 주방은 분주해졌고 외국인은 식탁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적막했다.  외국인은 잠깐 쉬다가 새벽에 또 길을 나섰다. 어두운 길을 향해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뜬금없이 그 장면이 생각난 걸 보니 어쩌면 나도,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지쳐있는 상태인 건 아닌가 싶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지쳐있었는 게 맞았다. 업무가 많아서 힘든 것도 있지만, 원래 나는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사람이라 업무에 있어서 크게 지치는 편은 아니다. 일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다. 사람. 나는 사람에게 지쳤다. 앞에선 응원하지만 뒤에선 이간질하는 모습, 서로를 불신하고 욕하는 모습, 내가 하는 일에 관심 주는 사람은 없지만 한 명 한 명 설명해야 하는 상황, 업무 방향이 맞는지 헷갈려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황까지. 여러 상황이 더해져 열심히 일하는 게 버겁고 지쳐버린 게 아닐까. 어느새 말하는 것도 힘에 부쳐, 설명해야 할 때가 오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그거...


 집으로 가는 길에 '70년 장인이 만든 가방', '무엇이든 만들어드립니다.', '폐업합니다' 등 가게 문 앞에 A4 용지로 쓴 글이 보였다. 가방 장인인데 가게 내부는 가방이 아닌 다른 물건이 있었고 폐업한다는 가게 안에는 직접 만든 가구가 있었다. 꾹꾹 눌러쓴 글씨에 많은 이야기가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본인이 하고 싶은 일과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많이 혼란을 느꼈겠구나, 결국 놓아버리는구나. 살아갈 방법을 찾는구나. 오늘도 내 시선으로 길 위에 있는 여러 가게를 살폈다. 돈을 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일, 재미있는 일만 할 순 없다. 부딪히면서 힘든 일이 생기고 어떻게 털어내는지에 따라 성장하고 실망하고를 반복한다. 내가 생각한 것과 사장님의 이야기가 다를 순 있지만, 괜히 씁쓸했다.


 물론 나도 그렇다. 내가 하는 일에 회의적일 때가 있지만 생각하는 것도 지쳐 생각을 멈추고 침대에 누워버린다. 지쳐있다는 건 알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지친 상태로 나를 놔뒀다. 내가 열심히 해도 여긴 회사이기 때문에 성과 얘기를 뺄 순 없다. 성과를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고,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이해되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를 욕하고 탓해야 하는 상황도 생기기도 한다. 나도 어느 회사와 다르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참, 그게, 많이도 지친다.


 집에 왔는데 편안한 듯 편안하지 않았다. 당이 떨어졌나 싶어 우유와 초콜릿을 섞어 초콜릿 라떼를 만든 뒤 시원하게 들이켰다. 갈증은 해소된 듯했으나 여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난 집에서도 나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없었다. 스페인 하숙처럼 잠시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했던 걸까. 나 힘들어요, 나 잘 살고 있는 게 맞을까요, 이 회사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내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꺼내거나 잠깐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 오늘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쌓아둔 채 침대에 누웠다. 다운된 목소리, 내려간 입꼬리, 거울 속 심드렁한 표정까지.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게 확실했다. 기분이 나아지지 않은 채 핸드폰을 하며 잠들었다. 또 출근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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