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30대 초에 이 영화를 처음 접할 기회가 있었고, 매우 기분이 찝찝했던 기억이 있었으며 근래 우연히 이 영화를 평론한 TV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어느 정도 이제 육아에 대해서 알수 있는 40대의 부모가 되어서 다시 본 이 영화는 쓰라렸다.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요 근래 수많은 사회의 일탈 행위들 , 대중에 가해지는 폭력, 학급 내 집단 따돌림 등등 수많은 가슴 아픈 뉴스들이 우리의 마음을 후벼 판다. 그로 인해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들의 목숨마저 빼앗기는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에바 그리고 케빈은 모자지간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아주 명확하게.
케빈은 악일까? 결국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했으니까 말이다.
법리적으로나 , 사회적으로나 그 어떤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그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죄인이고 잔인 무도했으며 심지어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는 “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못내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다.
누구의 강의에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온전치 않다. 다만 가장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
사람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4가지 정도 있다. 그래서 보통 4 다리를 가진 의자처럼 사람은 잘 쓰러지지 않는다. 사이코패스는 그중 하나가 결여되어 있다. 감정과 공감의 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다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래도 다리가 3개이기 때문인데 이 마지막을 버티고 있는 3번째 다리가 바로 가족이다. 올바른 가족을 가지고 있다면 사이코패스도 일반인처럼 살수 있고 넘어져서 사람의 도리를 버리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은 사회의 근간이자 개인의 최후의 보루이다.
일에 파묻혀 산 아버지로서 , 한 번은 사업에 실패하여 제대로 가족을 돌보지 못한 가장으로서 마음이 애이고 가슴이 아팠다.
에바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 개인의 성취를 위한 노력을 이해한다. 나도 그녀도 자신의 삶을 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에바는 가장 사랑했어야 할 자녀에게 가장 크게 버림받았고, 그 사건으로 사랑하는 자녀도 배우자도 다 잃어버렸다.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은 거의 맨 마지막의 케빈의 말이다.
케빈은 자신에 찬 얼굴로 세상을 비웃으며 말했다. 세상은 결국 나 같은 사람을 볼 거라고, 비틀린 자아와 삐뚤어진 애정 그리고 집착을 품고 엄마에게 그렇게 자신을 증명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사건으로부터 2년이 지나 성인이 된 케빈에게 에바가 묻는다.
“이제는 말해줘 그때 대체 왜 그랬니?”
케빈은 대답한다.
“그때는 (이유를) 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확실하지 않아”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반성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럼에도 자신을 찾아오는 엄마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가 삐뚤어져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인정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교도소밖으로 나오는 에바를 향해서 비추는 빛은 에바의 마음의 응어리가 풀렸다는 반증일까 아니면 성인이 된 아들이 이제는 본인의 일에 책임을 지게 되고 에바가 더 이상 엄마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는 암시일까.
이 시대의 워킹맘, 워킹대디들은 이 문제들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는 오로지 자기 자식만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도 하고 자식에게 삐뚤어진 애정으로 학대를 저지르기도 한다. 요즘 아동 학대 뉴스들은 읽고 있는 것 만으로 너무 끔찍한 실화들이 올라온다
사실 여러 할 말이 많지만 요즘 느끼는 중요한 fact는 모성도, 부성도 어쩌면 인간의 본성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은 우리는 수천 세대를 거쳐 우리의 자녀를 잘 키워야 한다는 교육이 우리의 DNA에 스며든 것일 수도 있고 , 이기적인 본성을 억누르고 인류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생물학적 이유로 자녀를 돌보도록 진화한 것일 수도 있다.
너무나 많은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사실 그렇게 동의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리지 않고서야 어찌 자기 자식에게 그럴 수 있는가. 그렇게 케빈에게 매몰차고 자신이 항상 더 많이 소중했던 에바도 케빈의 학교에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면서 케빈이 그랬을 것이란 생각을 1도 하지 않았으며, 케빈을 매우 걱정하였다는 마음을 원작 소설에서 밝히고 있다.
에바는 에바 나름대로 , 케빈은 케빈 나름대로 서로의 공간을 차지하고 , 너무나 짓궂게 서로의 이해와 애정을 바랐다. 영화에서 결국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리고 에바는 너무나 잔인한 복수를 당했고 , 케빈은 죄를 대가를 치르게 되었지만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결론은 그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군가는 반성했을 거고 , 누군가는 괴로웠을 거고 , 누군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거고, 누군가는 매우 스트레스를 받았을 수 있고, 에바를 혹은 케빈이 매우 싫어졌을 것이지만 결국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그는 실제 사회에 있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워킹맘, 워킹대디들은 솔직히 힘들다.
툭하면 발생하는 야근, 맘 편히 아이를 맡길 수 없는 불안감, 회사에 보이는 눈치, 그렇다고 충분한 돈을 버는 30~40대 부모는 많지 않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소홀했거나 , 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화를 냈거나 , 돌이켜보니 아이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했었던 일들이 사실 너무 많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 이제는 초등학생이 된 아들을 바라보면서 느낀 감정을 이 시대의 워킹맘, 워킹 대디와 나눠보고 싶었다.
고생했다
키우느라 고생했다.
엄마 아빠 하느라 애썼다.
잘 커줘서 고맙다.
많이 안 아파줘서 그리고 엄마 아빠를 사랑해 줘서 고맙다
결론적으로는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이 말을 나누고 싶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찝찝함은 이것이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좀 더 사랑을 담아서 하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오늘 집에 가면 아들 한번 꽉 안아주고 고맙다. 사랑한다. 해줘야겠다.
이제 징그럽다고 도망 다닐 거 같긴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무척이나 괴롭고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지 못한 어른으로써 미안하고, 학대로 인해 고통받고 제대로 세상을 누려보지도 못한 모든 아이들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추모합니다. 미안합니다.
좀 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만들 수 있기를 사회가 어른들이 더 노력하길 바라고 저도 조금이나마 더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