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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몽블 Sep 07. 2016

(단편소설) 구름 위의 만찬 1화

투두둑- 빗방울이 어둡고 습한 지하 창문을 때리며 굴러간다. 아직 해가 일지 않은 새벽, 그녀는 창문을 두드리는 물방울들 소리에 4:25분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을 뜬다. 불빛이라곤 반쯤 보이는 창문에서만 느낄 수 있는데, 그것마저 캄캄하고 무거운 하늘에 가려 저녁인지 아침인지 분간할 수 없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똬리를 튼 뱀처럼 이불속에서 밍기적거리다가 이내 알람이 울리자 몸을 일으킨다. 4:27분 아무런 의식이 없어 보이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화장실 불을 팟-하고 킨다. 4:40분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와 로션을 바른 뒤 어젯밤 떠놓았던 자리끼 한잔을 벌컥벌컥 마신다.


4:45분 옷장 문을 연 여자는 몇 개 없는 옷 중 가장 앞에 있던 검정 티셔츠와 검정 바지를 집는다. 4:50분 집 밖으로 나온 여자는 4:56분 회사에 도착한다. 같은 시간 같은 행동의 무한반복인 일상. 그녀는 매일 일어나는 시간도 밖으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늘 동일했다. 여자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노력도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기에 이 숙복적인 삶에 만족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용기가 없어서 그리고 먹기 위해서라는 허망하고 잔인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녀의 회사는 집에서 오 분 거리였는데, 늘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너무나 편한 차림으로 회사에 갔다. 하지만 회사에 도착하면 그녀는 파란색 머리망을 머리에 쓰고 흰색 모자를 목까지 덮는 위생모를 착용했다. 집에서 입고 나온 검정 옷은 회색 철재 캐비닛에 박아두고 흰 옷, 흰 바지, 흰 장화, 흰 이중 위생모로 온몸을 하얗게 하고 블랙홀같이 까맣고 텅 빈 혼몽한 눈만 보이게 복장을 갖췄다. 꼭 아바야에서 눈만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완전히 가린 중동 전통의상 니캅의 화이트 버전을 입은듯했다. 그 후 진공청소기로 그나마 남아있던 욕망 덩어리 같은 작은 먼지들을 제거하고, 그래도 떨어지지 않은 건 먼지 제거 테이프로 온몸의 오물질을 없앴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손톱 사이사이를 세척하고 입구를 통과하기 전 강한 바람으로 먼지를 날려주는 에어샤워기를 통과해야 비로소 입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상태처럼 동공이 허공을 향해 있었지만 그 행동들은 몇 년간 반복한 동작인 듯 물 흐르듯 빠르게 진행됐다. 은빛 두꺼운 철문을 통과하면 식전에 먹는 단내 가득한 빵 향이 코를 자극한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지나 그녀는 자신이 담당하는 한식 핫 키친 파트로 들어선다.


- 어, 언니 왔어요?


그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지희는 그녀를 알은체하며 잘 보이지 않은 입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응-이라는 개미 목소리보다 못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늘 그래 왔던 일이라는 듯이 지희는 답도 없는 그녀에게 조잘거린다.


그녀가 하는 일은 비빔밥, 불고기, 영양쌈밥과 같은 메뉴를 만드는 일이다. 어쩌면 음식을 만드는 일보단 이코노미 석, 비즈니스 석, 퍼스트 클래스 석에 각각 맞는 팩과 그릇에 음식을 담아 기내식 트레이로 옮기는 일을 더 많이 할 때도 있다. 만드는 양은 그때그때 항공기 노선과 스케줄, 탑승인원에 따라 달라진다. 해당 노선에 제공되는 메뉴도 천차만별이라 그 메뉴에 맞춰 재료를 준비하고 조리를 시작한다. 조리실에는 한식과 일식, 중식, 양식 등 기내식 종류별로 해당 유명 셰프가 요리를 한다. 그녀는 셰프들을 도와 간단하고 반복적인 음식들을 만들고 담는다.


그녀가 애호박을 한 300개째 썰고 있을 때, 그녀 옆으로 한식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허인식 메인 셰프가 다가왔다. 깡마른 그녀와 대조적인 커다란 곰 같은 덩치에 억지로 입은 흰색 조리복이 힘들게 잠가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애호박에만 집중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비행기 타봤어?


기름지며 조악한 눈빛에 그 말투는 명백히 냉소적이며 적대적인 느낌이었다. 그녀는 작게 아뇨, 했다.


-역시. 그쪽은 비행기를 안 타봐서 잘 모르겠지만, 비행기를 타면 혀가 달라져. 혀에 돋아있는 작은 돌기 있지? 그걸 미뢰라고 하는데, 이 미뢰는 딱 해수면 1000피트 이내 높이에서 까지 제 기능을 한다고. 그런데 우리가 타는 비행기는 보통 장거리 비행기 고도 3만 5000피트를 날아.


허인식은 삼만 오천 피트를 끊어서 강조하면서 한 손을 들어 비행기처럼 물결 흉내를 냈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의 손을 눈으로 따라갔다.


-그렇게 기압이 떨어진 미뢰는 엉뚱 멀뚱해지지. 뭐지? 이게 맛있는 건가? 이렇게.


허인식은 혀를 내밀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은 콜레라 걸린 돼지와 흡사했다.


-거기에다가 건냉한 기내석 공기는, 냄새~ 이 달큰한 애호박 향도 못 맡게 할 정도로 코를 마비시켜. 그래서 기내에서 먹는 맥주나 와인도 잘 선택해야 하는 거야. 와인은 과일 맛이 나지 않는 드라이 와인으로 하는 게 좋고. 비행기에서 타닌은 배가되니 더 빨리 취하지. 비행기에서 와인 먹어봤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여전히 손은 애호박을 썰고 있다. 여자의 옆으로 볶은 애호박, 살짝 데친 콩나물, 버섯, 얇게 채 썬 무, 작은 쇠고기가 보인다. 기내식 비빔밥은 보통의 비빔밥과 다르다. 고슬고슬한 밥을 만들 필요도 없고, 나물과 고명을 색과의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할 필요도, 양념해둔 다진 쇠고기를 볶다가 고추장, 설탕, 물을 1:1:1로 넣어 부드럽게 볶아 약고추장을 만들 필요도 없다. 기내에선 짜서 먹는 고추장볶음을 사용하니까. 기내식은 비행기 출발 전에 여기 땅에서 만들어져 냉동상태로 기내로 운반되고 이를 데워서 그저 인스턴트식품처럼 손님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간편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도 기내식이 최고인양 말하는 허인식의 말투에 여자는 속이 쓰라렸다.


-아, 맞다. 비행기도 못 타봤다고 했지.


웃음. 그것은 흡사 자신을 좀 바라봐 달라는 듯 화려한 색으로 자신을 포장한 독버섯 같은 미소였다. 비웃음이 분명함에도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늘 상 있는 일이라는 듯 한 얼굴,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미소도 화남도 비춰지지 않은 무표정에 담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지희의 표정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보였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제공된 음식은 간이 조금 짜고 양도 적은 거야.


허인식은 그 말을 하면서 여자의 말캉한 가슴을 만지듯이 그녀의 왼쪽 팔을 주물럭거렸다. 그녀는 일순간 표정이 굳어졌지만, 온몸이 감싸져 눈밖에 보이지 않는 흰옷에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진 걸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자신을 만지는 변태적인 행동보다 요리에 ‘요’ 자도 모르면서 저 자리에 주인 잘 만나 평생 호강을 누리는 옆집 개처럼 앉아있는 허인식이 싫었다. 허인식이 사라지자 그제야 멀리 떨어져 한마디도 안 하던 지희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는 거예요. 화를 내요 화를! 아우 재수 없고 변태 같은 놈. 세상에 어느 여자가 저런 남자를 좋아하겠어요. 안 그래요?


가증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는 지희를 본다. 하지만 그 눈빛을 금세 거두곤 그녀는 그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일을 계속했다. 약간의 두통과 메슥거림이 있는 듯 명치를 두어 번 두드리던 여자는 다시 애호박에 집중을 한다. 그녀는 남은 애호박을 다 썰곤 커다란 무쇠 솥에 잘근하게 다져진 소고기를 볶는다. 소고기의 풍미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콧구멍 양쪽으로 기분 좋은 향이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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