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도 엄마의 일기에 2016년도 제 일기를 더한 글입니다. 엄마의 하루와 제 오늘이 담겼습니다.
1991.9.12. 목 맑음 엄마가 쓴 일기입니다.
: 이름 - 이슬
슬이는 최초로 작은 엄마가 사다준 딸랑이를 손에 잡고서 간간히 몇 번 딸랑거렸다.
고사리 손으로 헐겁게 손에 딸랑이를 잡고 입 쪽으로 가져가니 가볍게 소리가 났다.
네 모습이 얼마나 예뻤던지 엄만 꼭 깨물어 주고 싶었단다.
이내 슬이는 피곤한지 손을 펴면서 딸랑이를 떨어뜨렸고 다시 손에 쥐어주니 싫어했단다.
저녁때 출생 신고를 하고 왔다는 아빠에게 얘기하니 흐뭇해하신다.
이모는 날이 갈수록 우리 슬이가 뽀얗게 되면서 이뻐진다고 하셨다.
엄마가 주는 우유 많이 먹고 어서어서 자라거라.
슬이 입술에서 한 꺼풀 껍질이 벗겨졌다.
젖꼭지를 빠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크는 동안 몇 번을 벗겨진다고 이모는 말씀하셨다.
우유를 먹는 동안 먹고 나면 네 이마엔 땀이 송송 맺히고 온 머리는 땀으로 젖어 있구나.
네 모습에서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한모습을 본다.
본능적으로 빨아대는 네 모습을 보노라면 신기하다.
땀 흘리며 먹는 네 모습을 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힘 안 들이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어서어서 크거라.
2016.09.09 금요일
백수가 된 지 9일 차.
부모님에 권유에 떠밀려 군청에서 열리는 작은 취업 박람회에 가게 되었다. 집과는 거리가 쫌 있지만 차를 타고 가기엔 가까운 거리여서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날도 이쯤이면 선선하겠다 싶어 정장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옷을 입곤 집을 나왔다. 바람이 살랑살랑 머리칼을 건드렸다. 바람결에 시원 초록빛 잎을 흔들거리는 나무들이 파이팅을 하라고 네게 응원을 보내는 듯했다. 발걸음은 억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무거웠지만 내가 백수가 되어 이렇게 집에서 놀게 된 건 내 탓이거니 하고 입을 앙 다물었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열리는 취업 박람회는 박람회라고 하기엔 생각보다 많이 협소했다. 천막으로 칸을 나눈 곳에선 20여 개의 중소기업이 일렬로 줄지어 있었다. 면접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업 당 두 명씩 칸칸이 앉아 있었다.
이곳에 들어가기 전 나는 입구에서 잠시 발을 주춤거렸다. 입구엔 주변 학교 고등학생들이 잔뜩 있었고, 안쪽엔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어딜 둘러봐도 20대 후반인 내게 맞는 직장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어떤 직업군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용기를 내서 입구에 발을 들였다.
초록색 조끼를 입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주머니가 얼굴을 갸우뚱- 하시더니 "학생?" 이렇게 물음표를 붙이면서 물으셨다. 나는 작게 아뇨-,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 기업에서 나온 분이시구나!"라고 말하시며 손에 들고 있던 팸플릿을 내게 건네주려다가 도로 가져가셨다. 나는 또 작게 아닌데요-,했다. 그제야 아주머니는 멋쩍은 듯 팸플릿을 아무 말 없이 건넸다.
입장하자마자 왠지 모르게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입장하는 그곳에서 엉거주춤 제대로 된 한발 자국을 떼지 못한 내가 손에 들게 된 팸플릿을 그 자리에서 열었다. 파란 팸플릿엔 참여한 기업 이름, 기업별 원하는 사람, 급여, 담당업무가 적혀있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20여 개의 기업들에 적혀있는 모든 업무를 눈으로 쭉- 훑고는 뒤를 돌아 그곳을 나왔다.
전 직장도 전전 직장도 서울에서 온라인 마케팅 일을 했던 내가 회계, 경리, 생산직 일을 보고 지레 겁을 먹어 박람회장을 나온 것이다. 시골 취업박람회에서 큰 기대를 한건 아니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안 간다고 할걸.
서울에서 내려오지 말걸.
등등 후회가 가을바람처럼 불어왔다. 너무 일찍 집에 들어가면 한소리를 들을 것 같아 도서관에서 한 시간 정도 책을 읽고 집엘 들어갔다. 들고 간 이력서 그대로 가져온 나를 보고는 엄만 내게 절박함이 부족하다고 했다. 절박하지 않은 건 사실인데.. 절박하지 않으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절박할수록 더더욱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 거리는데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또 깨닫는다.
불안하다, 불안타.
그렇지만 그 불안함 때문에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 않은 내가 너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