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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몽블 Oct 14. 2016

그녀의 꽃자리

          <그녀의 꽃자리>

     앉은 자리가 꽃자리 이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이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 이니라




내가 좋아하는 구상 시인의 <꽃자리>를 한창 읊조리며 나의 처지, 나의 자리를 돌아보던 즈음 봄바람에 벚꽃이 흩날리듯 흐드러지게 눈발이 날리던 날 한바탕 소나기를 맞고서야 정신을 차린 중년의 여인을 책을 통해 만났다.


그녀는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에서 어린 나이에 천생연분을 만나 아주 잠깐 아가씨 시절을 누려보곤 바로 결혼이라는 굴레에 묶여 젖소 목장을 하며 살아간다.


축사에서 소똥을 치워가며 자신과 같이 배운 것도 아는 것도 부족한 남편과 함께 그냥저냥 살아가다 가끔은 미혼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홀가분히 청바지 입고 생맥주 마시던 시절을 막연히 그리워만 하던 어느 날

딸아이가 켜놓은 컴퓨터 앞에 앉아 우연찮게 낯선 남자랑 채팅을 하게 된다.


무조건 본인의 잣대로만 재단하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우겨대며 사사건건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에게 진저리를 치다 나긋하고 품위도 있어 보이고 무엇보다 자신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직업이 의사라는 남자를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 것 같다며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기에 이르고 핸드폰이 없는 그녀는 머뭇거리다 상대방이 모니터에서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싶어 조바심으로 얼떨결에 남편의 번호를 알려준다.


미리 자신의 핸드폰을 장만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다 행여나 폰이 울릴까 싶어서 남편에게 건네지도 못하고 자모회장에게서 연락이 올 거라며 한사코 남편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한다.


식사 준비를 할 때면 바가지로 살짝 덮어서 싱크대에 올려놓고 축사 청소를 할 때는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이제나저제나 벨이 울리기만을 학수고대한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 혼자서 모래성을 쌓다가 부수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의 감정에 중년의 여인은 그간 잊고 있었던 사랑의 달뜸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이런 마음을 남편이 알아차릴까 겁도 나고 한 편 남편에 대한 미안함에 이런 경우 남편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남편의 의중을 살짝 떠보았으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골 빈 것들이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는 거지 정신 온전한 인간들은 하라고 해도 안 할 것이다”라며 그런 걸 묻는 그녀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한다.

그런 생각이 어디 그녀 남편만의 생각이겠는가.


다수의 보편적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이겠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 하지 않던가.

그녀는 남편에게 들켜 다리몽둥이가 부러진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며 다리에 깁스를 하고서라도 만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이미 사랑의 달콤함을 알아버린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남편에게 자모회원들을 만나 밥 먹고 노래방까지 들러 늦을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채팅남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러나 막상 만난 채팅 남은 그녀가 매일 밤 그려보던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의사는 물론 아니거니와 건축현장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해 그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며 치료를 계속해야만 하는 사고와 함께 꿈도 잃어버린 서른을 훌쩍 넘겨 마흔이 다 된 노총각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장난칠 생각은 아니었다며 치료차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채팅을 하게 됐고 자신의 어렸을 때 희망이 하얀 가운을 입고 회전의자에 앉아 청진기를 목에 걸고 환자를 돌보는 것이었다며 하루 종일 젖소 돌보고 축사 청소하다 지쳐있을 때 잠시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그를 뒤로하고 그녀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오늘도 여전히 굳어버린 젖소 똥을 삽으로 박박 긁고 있던 땀범벅인 된 남편의 가슴을 파고들며 소리 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그리고 진동으로 해놓았던 핸드폰의 벨소리를 최대로 높여선 남편에게 건넨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일상의 무료를 겪다가 그렇게 한바탕 소나기를 맞은 그녀는 구름 걷혀 다시 찬란히 빛을 내는 햇빛이 그제야 고마움으로 다가오고 늘 상 받고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던 남편의 넉넉한 품을 감사하며 소똥 냄새나는 축사가, 건강한 땀방울을 흘리는 남편 옆이, 늘 그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져 벗어나고만 싶어 하던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임을 알게 된다.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고마움을 쉽게 잊고 내게 없는 것, 내게 부족하다 싶은 것에 얽매어 가끔은 자신을 비관하고 한탄하며 산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암이 남과 비교하는 “비교암”이라 하지 않던가.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만족하는 삶이 최고의 삶이 아닐까 해서 올려다본 가을 하늘에선 막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낙엽들이 어느새 내 주위를 갈색 꽃밭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네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 이니라”

어디선가 바람 타고 환청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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