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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일호 Oct 19. 2021

영국과 이탈리아, 두 집 살림하는 한국인 부부

하지만 우린 여전히 한 지붕 두 디자이너


우리 부부는 영국과 이탈리아에 떨어져 살고 있다. 같은 유럽이지만 무려 1240km 거리다. 차로는 13시간, 비행기로는 1시간 40분, 유로스타와 떼제베 기차를 타고 가려면 9시간이나 걸린단다.




깨와 꿀이 쏟아지던 첫 번째


사실 롱디의 기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 사귀자” 하던 귀여운 시절, 100일이 막 지날 때 즈음에 나는 휴학을 하고 중국으로 갔다. 마침 중국 상해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막내 동생을 챙겨줄 겸, 고등학교 때부터 배우던 중국어를 더 공부할 겸, 엄마와 바통터치를 했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생이었던 막내 동생의 밥을 차려주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학교에 가는 셔틀버스를 태워 보내는 엄마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선 매일 중국어 학원으로 향했다. 물론 내가 너무나도 원했던 시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생활하고 싶었던 나는 중국어를 더 잘하고 싶었고, 중국이라는 나라와 문화에 대해서 경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있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100일 전, 갑작스레 남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이미 다음 학기는 휴학을 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다 결정된 상태였다. 중국으로 가기 직전엔 그와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슬퍼 엄마에게 걱정된다고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더란다. 그렇게 깨와 꿀이 쏟아지던 연애 초반, 우리는 한국과 중국에 6개월 동안 떨어졌다. 그리고 매일 핸드폰을 붙들고 잠에 들기 일쑤였다.





서로 정말 좋아하는구나

깨닫게 해 준 두 번째


그 후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 나는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나왔고, 그는 한국에서 석사를 준비했다. 우리의 두 번째 롱디. 시차가 9시간이나 나기 때문에 영국이 저녁 시간일 때에 한국은 잘 시간이었다. 당시 우리 사이 시간의 차이처럼, 우리의 꿈과 현실의 차이는 컸다. 20대 중반 대학 졸업을 유예하고 취업 준비를 하던 시기, 그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나는 UX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더 디자인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우린 각자가 앞으로 긴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을 선택했던 것 같다. 우리도 모르게.



연애한 지 4년 가까이 되어가던 이때에 영국과 한국 사이의 거리는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나름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옆에 가까이 있진 못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존재가 이렇게 큰 힘이 될 수 있구나 와닿는 순간들이 겹겹이 쌓였다. 또한 한국에서 많은 시간을 붙어있으면서 서로에게 당연스레 의지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나도 그도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본 세 번째


결혼하고 우린 런던으로 왔고, 이제는 떨어져 지낼 일은 없겠구나 안심했다. 그런데 석사를 하던 남편에게 인턴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독일의 자동차 대기업. 그런데 독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결혼한 지 10개월 만에 독일로 갔다. 내가 런던에서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좀 넘었을 시기였다. 순간 감상적인 고민이 머리를 가득 찼다. 그와 함께 살고 싶어서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 낯선 영국 땅에 와있는데, 떨어져 지내는 게 맞을까. 그럼 난 무슨 기쁨으로 매일을 지내지.



하지만 그는 인턴이었다. 영국에 석사 과정도 남은 상태였고, 그 회사에서 인턴을 끝내고 바로 취업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불안정적인 그의 상태가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동시에 그가 오랫동안 희망해 온 직업이 마냥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나의 일 역시 좋았다. 당장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따로 떨어져 지내며 시간을 벌기로 했다.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누구나 바랄 것이다. 다만 이 순간은 실력이나 노력, 운 만으로는 찾아오지 않는다. 때로는 ‘시간’이 필요하다. 꿈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물론 이 시간은 경제적인 것과 연결되기도 한다. 누구든 그 시간을 버티려면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그 꿈에 매진해야 하니까. 혼자라면 더 힘들 것이다. 몸은 하나고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은 평등한데, 한 사람이 경제 활동도 하고 꿈에 매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우린 둘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시간을 벌어주기로 다짐했다.


독일 하노버에서 보낸 주말, 2018




상대방에게 시간이 필요할 때 그 시간을 벌어주는 것은 부부가 되면서 얻을 수 있는 큰 혜택이다. 물론 여러 방면에서 매우 어렵다. 서로가 균형을 잡는 것도, 고마움이 미안함이 되지 않게 하는 것도, 무엇보다 건강하게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 때로는 자기 전 기분 좋게 목소리를 들으려 한 전화가 비수를 꽂는 대화가 되어 잠에 못 들게 하기도 하고, 기분이 태도가 되어 서로를 할퀴기도 한다. 얼굴을 마주할 수 없으니 쉽게 해결될 일도 돌아가야 한다.



그와 나는 독일과 영국에 떨어져 지내며 7개월 동안 이 시기를 지났다. 그리고 결국 그에게 부탁했다. 인턴을 더 연장하지 말고 영국으로 돌아와 줄 수 없겠냐고. 혼자 지내는 일상이 힘들고 외롭다고. 그래서 그는 회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비록 그와 나는 디자이너로서의 가능성을 봤고 좋아하는 일을 직장으로 얻는 기쁨을 누렸지만,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앞으로는 떨어질 일이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네 번째


역시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다시는 떨어져 살 일이 없을 거라던 우리의 기대는 어긋났다. 물론 좋은 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우리가 결정한 것이고, 언제까지 떨어져 지낼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영국과 이탈리아는 주말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말 부부’와 ‘월말 부부’ 사이쯤 된다. 마음먹으면 무리해서라도 갈 수 있는 거리여서일까, 떨어진 거리만큼 더 보고 싶다. 동시에 보고 싶은 만큼 연애하는 기분이 든다. 사실 이번 주말 그가 왔다. 비행기 시간에 우리의 스케줄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24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밖에 올 수가 없었다. 나와 그 하루를 보내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오는 그를 기다리는데 왠지 모를 설렘이 느껴졌다. 5년 반 연애를 하고 결혼 4주년이 지난 지금, 우리를 더 끈끈하게 이어주는 이 시간이 아직은 좋다.





드디어 우린 비로소 디자이너이자 부부가 되었다. 비록 너무 다른  나라에 떨어져 있지만,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던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며 살아가기를, 상대가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간을 벌어주며 기다려주는 서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당신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소중한 존재가 되기를 조심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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