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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Sep 23. 2019

나희덕 시 "누에"

아가야, 내 몸에서 나온 비단 같은 내 아가야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2004, 문학동네)     




동년배 여성시인이 쓴 이 시를 읽으며 얼마나 마음이 짜안했는지 모른다. 나도 저와 비슷한 풍경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 꼽추의 신체로 두 딸 예쁘게 키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을까? 혹시 저 손잡고 걸어오는 모습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 같은 화해와 반성과 용서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때 하필이면, 아니, 다행스럽게도 나희덕 같은 좋은 시인이 맞은편에서 오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 시는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로 시작해 ‘어미=누에’와 ‘고치=혹’과 ‘딸=비단실’이라는 세 개의 메타포를 거쳐 ‘만삭의 배’를 하고 있는 현실 속 자신으로 맺는다. 문득 발견해서 곰곰 깊은 생각을 거친 뒤에 새삼스럽게 다시 본다. 누에처럼 작은 꼽추 어미가 신체 멀쩡한 두 딸을 장성하도록 키우기까지 말 못할 사연이 얼마나 많았을까. 장편소설을 한 편 써도 좋을 만한 그 스토리를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비단실을 뽑아내고 이제는 비어버린 누에’로 솜씨 좋게 함축해버린 것. 

스무 해는 족히 넘었을 사연이 상상력의 비단실을 타고 내 만삭의 몸을 휘감는다. 아직 뱃속에 있으므로 사연다운 사연을 뽑아내기 전인 나의 아가. 눈앞의 저 어미보다는 조금 큰 누에인 나의 몸에서는 어떤 비단실이 풀려나올 것인가. 여성이 어미로서 아기를 낳아 기른다는 건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내는 일. 그 숭고함에 감싸여 가던 길을 멈추고 새삼스럽게 제 만삭의 배를 쓸어안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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