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이 당신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17절)
• 이것은 아담의 계보이다. 하느님이 당신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아담'이라 일컬으셨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다.(창세기 5장 1절부터 5절)
○ 아담은 본래 남과 여를 통칭하는 낱말이다.
에덴동산 설화와 카인과 아벨 형제 이야기는 천지창조 이야기와 족보(아담부터 노아의 가족까지) 사이에 다소 억지스럽게 편집되어 있다. 이 억지에 억지를 더하느라 킹제임스 버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 남녀를 아담이라 불렀다는 히브리어 창세기의 아담을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남자의 몸에서 여자가 나왔고 여자가 동산의 금기를 먼저 어겼다는 설정은 설화를이용해서 가부장제와 일부일처 제도를 확립시키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한다. 인간이 창조된 지 100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카인)과 양을 치는 사람(아벨)이 등장할 리 없다. 카인과 아벨 형제 이야기는 저자들이 살던 시대에서 곧잘 발생했던 농경 정착민과 유목민의 갈등을 표현하고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에덴동산 설화는 하느님과 인간이 단절된 계기를 '지식의 나무에 달린 열매(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으로 설명한다. 단절도 중요하고 단절의 원인도 중요하다. 문제는 기독교 교리가 그 열매의 정체를 파악하려 들기보다 '사망의 기원은 죄'라는 엉뚱한 논리를 이끌어내어 원죄로 통칭하는 민중 지배 이데올로기를 남용해 왔다는 데에 있다. 원죄 즉 사망의 기원인 그 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않는다. 인간 또한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죽는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원죄는 중세의 고위성직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이교도의 관념에서 이끌어내 기독교에 무리하게 적용시킨 잘못된 교리이다. 인간이 본래는 죽지 않는 존재였다는 터무니없는 가설과 인류 최초의 죄가 '불순종'이라는 주장 또한 창조주 하느님의 품격을 깎아내리는 치졸한 개념에 불과하다.
실낙원
○ 하느님은 죽인다고 하신 적 없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니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장 16, 17절)
제정신을 지닌 자라면, 먹으면 죽을 만큼 위험한 물질에 손대지 못하게 명령하면서 그 명령을 어길 때 죽음의 벌을 내리겠다고 하지 않는다. 명령을 내린 취지가 죽을 위험인데, 그 명령을 어긴 대가로 죽음의 벌을 내리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열매는 모르고 먹었거나 알고 먹었거나 먹으면 죽는 것이다. 먹었다는 사건이 중요하지 불순종이 중요하지 않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이 부분을 읽는 사람은 벌을 내리는 두려운 하느님이 아닌 인간에게 닥칠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시는 하느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 실낙원은 추방이 아니라 안전 조치이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원히 살까 하노라.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인 땅을 갈게 하셨다."(창세기 3장 22, 23절)
인간이 금단의 열매를 먹는 일이 어째서 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데 결격 사유가 되는지에 대한 힌트가 등장한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기 때문!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들 즉 영적 존재로 보인다.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영적 존재와 어떤 유사점을 공유하게 된 인간이 그 상태로 생명 나무 열매를 먹으면 모순이 발생한다. 먹으면 죽는 열매와 먹으면 영원히 사는 열매. 이 모순의 해결책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에덴동산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동산에서 내보낸다. 추방이라기보다는 안전 조치이다. 아담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대가로 일단 죽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다시 살아난다면 생명 나무 열매를 먹는 일이 더 이상 모순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 놀랍게도 육신의 부활이 바로 모순의 해결책이다.
○ 인간은 처음부터 죽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죽음이 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인간이 죽지 않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전제를 오랫동안 고집해 왔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해 보라. 하느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장 28절) 명하셨다. 고작 두 사람뿐일 때에도 기어코 금단의 열매를 먹고 말 인간이 과연 무사히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지는 게 가능할까? 게다가 인간이건 동식물이건 죽지 않는 존재로 땅에 번성하면 땅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지구가 무한대로 확장하는 곳도 아닌데.
인류 역사에서 인간 수명이 수백 년이나 되던 시절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인간도 처음에는 생태계의 다른 동물들처럼 자연스럽게 태어나 죽어갔을 것이다. 인간이 처음부터 죽음을 죄와 연관지어 생각하며 천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본능적으로 죽음을 꺼려했을지언정 죽음을 죄와 연관지어 생각하며 천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발상은 죽음에 대한 터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며 심지어 바이블이 유래도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생명 나무의 열매'에서 예수의 부활로 이어지는 창조와 구원의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모든 영적 존재들은 경악했다. 하느님이 도대체 왜 인간을 지으셨는지 얼마나 큰 사랑으로 그들을 지으셨는지 측량할 수 없었던 그들은 예수의 부활로써 인간에게 놓인 죽음과 영생의 모순이 단박에 해결되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죽은 뒤에 부활한 자가 가장 먼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고, 이어 나머지 부활한 자들이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창조는 현재진행중이었던 것.
○ 남자의 영향 없이 태어난 두 번째 아담
에덴동산 설화에는 금단의 열매를 먹은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야비한 남성상이 들어 있다. 여자가 뱀에게 속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뒤 그것을 남편에게 권한 이유는 좋고 탐스러워 보여 사랑하는 그와 나누기 위험이었다. 반면, 사고의 책임을 떠넘기는 남자의 모습에는 사랑의 그림자도 없었다. 이는 인류의 실제 역사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을 띤다. 대형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남성 사회는 여성을 포용하지 않고 탓을 돌리거나 무시했다. 이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하느님의 섭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단순히 죽음과 영생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라면 하느님은 굳이 다른 구원자를 보낼 필요 없이 아담을 부활시켰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신 까닭에 부활을 이끌 첫 번째 인간은 사랑의 완성체여야 했다. 흙에 하느님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탄생한 아담과 처녀의 몸에 성령이 들어감으로써 탄생한 예수는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여기에 굳이 예수의 어머니가 원죄 없이 잉태된 여성이라는 무리한 생각을 끼워넣을 필요도 없다. 또한 성모 마리아가 예수 출산 이후 자식을 더 낳았거나 신으로부터 온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부부로 살았거나 구원 논리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오히려 원죄론이라는 희한한 논리야말로 성서의 큰 흐름을 망가뜨리고 있다.
예수는 남성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출생한 남성이란 점에서 또 하나의 아담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아담은 첫 번째 아담과 달리 죽음으로써 사랑을 완성하고 부활로써 영생의 자격을 얻는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선명한가?
다음 장에서는 인간 죄의식의 기원이 된 두 가지 사건인 불의 사용과 살인 사건을 창세기를 통해 다뤄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