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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다정 Dec 07. 2022

대기업 퇴사와 잦은 이직, 자존감에 대한 고찰

<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허지원 (지은이) >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초반에는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과거에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겪었던 상처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자괴감과 그로 인한 우울증 등을 겪었던 경험이 많이 떠올랐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이 길 끝에 뭐가 있느냐 하면, 자기 능력보다 훨씬 더 낮은 성취 수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인이 가진 자원이 100이라고 할 때, 어찌 된 일인지 이들의 성취 수준은 70, 80에 머무릅니다. 이들에게는 유독 생의 마디마다 유사한 경험이 반복됩니다. 자기 능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만한 결정적인 성취의 순간에 갑자기 엉뚱하게 행동하여 성공을 회피하거나 지연시키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자신은 성공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자신이 실제로 성공을 해서 경쟁심 많은 누군가의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을, 혹은 지지부진한 성취를 보이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줄 것을 지레 겁내기도 합니다. 이런 불안은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올 수도 있고, 무의식 수준에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실제로 몸 어딘가가 아프거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중도에 일을 포기하곤 합니다. 일이 꽤나 진전된 어느 시점에 이르러 도리어 모호한 부적절감을 경험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릴 적 꿈꿨던 자리가 아닌 곳에 와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고는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정확히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교 졸업 후 대기업을 약 4년간 다니다가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수능 시험에 도전했고 실패, 우울증을 겪고 나서 다시 창업, 재취업을 거쳐서 이제는 이직을 앞두고 있다. 현재 나이가 33살인데 참 그동안 많이도 바꿔왔다. 나는 아직도 내가 대체 왜 이럴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낮은 자존감에서 이러한 현상이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대학교 졸업 후 바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3년 11개월을 다니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때는 일이 힘들기도 했지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에는 나이도 어렸고 내가 뭔갈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으면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만심이 가득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부족했기에  하루하루가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도 부딪혀보면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그냥 피해버린 것이다. 가족들을 포함해서 주변에서는 나를 다 뜯어말렸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그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그만두고 조금 쉴 틈도 없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초반에는 나름대로 공부가 재미있었고 열심히 했다. 약 6개월 동안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수능으로 전향했다. 수능으로 교대에 다시 진학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바꿨다. 이유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영향도 있었고 공무원보다는 교사가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도 사실 불안했지만 하고자 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시험을 망쳤다. 하루하루 시험을 못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실패하면 회사를 그만둔 난 뭔가... 라는 생각 때문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했다. 사실 이미 나는 회사를 그만 둔 것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부정하고 계속 달려온 것이다. 수능을 다시 재도전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시험 자체가 이제는 너무나 두려웠다.


사실 우울이나 불안 같은 임상적 문제의 기원은 ‘나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완벽주의였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고 어떤 때엔 과거를 복기했다가 어떤 때엔 수많은 미래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다가 하는 과정에서 마음은 과부하 상태가 됩니다.


 그래도 조금 쉬면서 멘탈을 회복해보려고 애를 쓰던 중 전 회사 동기가 팀장님께 재입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라는 말을 해줬다. 나는 당시 그 말이 내 희망의 전부였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내 생각이 짧았다고,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빌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전 회사 동기가 팀장님과 약속을 잡아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쁜 와중에 퇴사한 팀원을 만나러 시간을 내준 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애써 밝은척하다가 팀장님께 본론을 말씀드렸다. (이 사실을 내 손으로 쓰는것도 너무 쪽팔리고 아직도 숨고 싶다.) 전 팀장님 앞에서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결국 대답은 No였다. 결국 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졌고 나는 그날 이후 즉시 깊은 우울의 동굴로 빠져들었다.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가 나를 잠식했다. 거의 나흘 동안 꼼짝없이 누워서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단지 지난 과거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면 난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후회하고 있는 나, 멘탈은 약하고 자만심은 높은 나, 계속 실패하는 나... 이런 나는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이 세상에서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자살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하고 싶었다. 당시에 나는 시야가 너무 좁았기에 이 상황은 삶 자체가 무너진 것만 같았다.


압도적인 무력감과 무망감을 겪고 있는 우울한 사람들에게는 스스로가 빨려 들어가고 있는, 도대체 그 깊이를 모르겠는 어둠이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습니다. 현실감이 없어질 정도의 두려움이 엄습하는 날이면, 원치 않게 탑승한 자이로드롭처럼 내가 딛고 서 있는 발판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는 느낌도 듭니다.
연구로도 밝혀졌지만, 우울한 사람들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심지어 멈춘 것처럼 느껴져서 평생 의미 없는 시간이 이렇게 더디 갈 것이 공포스러워집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도 이어지고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사주를 보고 정신과에 가서 약도 먹었다. 5일 만에 머리를 감고 처음으로 잠을 잤다. 쉽게 우울증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래도 안 되면 또다시 정신과에 가서 약을 타왔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마음은 계속 힘들고 딱히 할 건 없으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 보니 글자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를 혼내고 질책하다가 위로도 해줬다. 책을 읽으면서 도서관에서 혼자 폭풍 눈물을 흘린 적도 많다. 이러면서 책의 구절을 똑같이 따라 쓰고 저장해두면서 다시 읽었다. 나아가 책의 구절 밑에 내 생각을 함께 적기도 했다.

 대학원 수업 시간에 김연수 작가님 인터뷰 영상을 듣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계속 나왔다. 아마 내가 겪었던 상황과 너무 비슷하고 그때 생각이 나면서 동시에 나만 그런 일을 겪은 게 아니라는 동질감? 안도감?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사람도 과거에는 다 방황하고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위로도 있었다.


 사실상 책이 반쯤은 나를 살렸다. 책이 허영으로 가득했던 나의 몸과 마음을 소독시켜주었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이렇게 정리하고 생각하는 데만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적어도 내 생각은 조금씩 올바른 길로 가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뼈를 사정없이 때리는 문장들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아프고 부끄럽지만, 진심으로 반성하고 내 자신을 바꿔보고자 노력했다.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내가 힘들다고 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잘 알게 되었다.


당신이 사랑받지 못할 존재여서가 아니고,  당신이 어딘가 결함이 있는 존재여서도 아니고,  당신이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존재여서도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봅시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다르다. 그때의 나는 취약했지만, 지금의 나는 타인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어도 충분할 만큼 적당히 불완전하고, 적당히 완전하다. 그리고 어쩌면 예전의 그들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나는 현재의 나와 내 사람들을 지키겠다."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더는 질책하고 몰아세우지 말고 좀 더 스스로 보듬어주고자 했다. 아래 글은 당시에 내가 직접 쓴 글이다. 어떻게든 바뀌어 보려고, 이 상황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했고 그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보았다.

물론 책을 몇 권 읽었다고 해서 우울증이 바로 나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책에 몰두할 때는 잠시 괜찮다가도 자려고 누우면 내일이 두렵고 남들은 출근하는데 나는 대체 뭐 하는건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김연수 작가님 말처럼 눈물이 날 정도로 막막한 시간이었다.


단, 서점에서 그럴듯한 이름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자기계발서들은 우울이 발생한 후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연구 결과로도 밝혀졌듯이, 우울한 사람들이 자기계발서나 셀프 심리치료 핸드북을 읽으면 증상이 더욱 악화됩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는데, 나는 왜 이게 안 되지?’ 하는 자기패배적인 생각에 빠지거나, ‘나는 꼭 이러저러하게 되어야지!’ 하는 의미 없는 공상에 너무 많은 인지적・정서적 에너지를 투입하면서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고 성취를 해야 할 상황에서는 이미 지쳐버리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위 구절을 보고 원인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책을 분명 읽고 나아진 건 맞고 마음을 굳게 다졌는데 책에서처럼 잘 안 되는 내 자신이 다시 마음에 안 들기 시작하고... 이런 뭐가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행복감에는 감사 일기 쓰기도 효과가 좋은데, 다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간격으로 해야지 매일 하면 매너리즘에 빠져 오히려 효과가 감소됩니다. 


책에서 감사일기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말에 매일 감사일기를 쓰기도 했다. 매일 자기 전에 감사일기를 쓰는 것이 효과가 있었다. 워낙 감사할 줄 몰랐던 성격이기에 이렇게 세상에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에 하루하루 놀라기도 했다. 감사할 게 도무지 없는 날은 쥐어짜서라도 적었다. 그냥 두 다리가 있어서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해하기도 했다.


물론 매일 일기를 쓰는 것에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감사일기를 쓰는 것조차 너무 버거운 순간이 찾아올 때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다양한 방법으로 극복해보고자 노력했다. 종종 상담도 받아보았지만, 시간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우연히 알게 된 언니가 어떤 목사님을 소개해주셨다. 종교가 기독교도 아니었고 교회도 몇 번 안 가봤는데 언니는 내가 걱정되는 마음에 꼭 한 번만 가서 상담받고 오라면서 나를 집 밖으로 꺼내주었다. 그 목사님께 상담을 서너 번 받아봤는데 놀랍게도 급격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종교의 힘으로 극복하게 해주셨다기보다는 그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게 해주셨다. 나는 원래 기준이 높은 사람이기에 쉽게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기에 자신에게 더욱 엄격하다는 것, 원래 타고난 성격이 그렇다는 것..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받아들이게 해주셨다.


나는 이렇게 서서히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책의 구절처럼 어제와 내일이라는 칸막이를 과감하게 치고 오늘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예전처럼 목표를 향해 무작정 달리기보다는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직 20대니까 20대때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자라는 열린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좋은 기회가 생기기도 했고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 삶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면 그냥 제가 없어도 되는 거잖아요. 제일 좋은 방법은 제가 인도를 걷다 자동차가 저를 덮쳐서 바로 죽는 건데, 그래서 저는 뉴스에서 사고로 누가 죽었다는 얘기가 나오면 이상한 희망 같은 것도 느끼고 그러다 죄책감도 느끼고……. 아무튼 마음이 복잡해요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상황도 많이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행복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종종 하고자 하는 일이 계속해서 잘 안 되거나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과거로 회귀하곤 했다. '그냥 내가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내가 지금 이러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끔 '운전하다가 누가 내 차를 세게 박아서 한방에 고통 없이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될 때가 있다. 굳이 내가 세상에서 이렇게 존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는 감사일기를 쓰지 않고 그저 내 어두운 생각을 써 내려간 일기가 있다는 것을 예전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놀라운 건 우울증이 시작된 후 거의 3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다.


첫째로, 잦은 실패 경험으로 만성적인 무력감과 공허감을 겪는 시기에도,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사랑받지 못했고, 실패했고,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당신 마음의 틀은
 명확한 근거나 구체성 없이 무턱대고 당신 스스로를 규정해버립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모든 사람에게 불쾌한 존재였을까?’
 ‘내가 정말 살아갈 이유가 없을까?’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불행했을까?’
‘모든 일에 실제로 실패했을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다 보면, 그동안 습관처럼 과잉 일반화하고 파국화한 막연한 세계와 나의 실제 사건들 사이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사실 아직까지도 계속 극복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나 자신이 인격적으로 많이 성숙해졌다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제 알고 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예전의 나처럼 그렇게 흔들리지는 않는 다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경험이 나에게 정말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당시 너무 힘들다고 방에서 혼자 울고 있을때 부모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넌 정말 돈 주고도 못사는 엄청난 좋은 경험을 하고 있는거야."

당시에는 속으로 이런 경험 따위 개나 주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당신은 실제로 힘든 시간을 보내왔지요. 그러나 당신의 과거는 당신의 미래를 정하기엔 이제 힘이 약합니다. 혹시, 지옥 같았던 상황, 그리고 당신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지금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요? 과거의 대처를 반복하고 있을까요? 아뇨, 아닐 겁니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보이는 것들이 있다. 결국 내가 깨닫게 된 중요한 사실(너무나 당연한 것)은 이것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몰입할 수 있는 일(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

내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일을 찾은 사람들은 축복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을 모른다면 찾아야 한다. 찾는 방법은 최대한 빨리 많은 경험을 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모든 일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다. 경험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한번 시작해보는 것에서 경험이 시작된다. 나는 방황했지만, 그 안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수많은 시작과 경험을 통해 나를 찾게 되었다. 이제서야 지난했던 그 시간이 조금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와 내 강점과 약점, 내가 행복을 느끼는 지점들에 대해 계속 배우면서, 나는 그때보다 훨씬 성장했습니다. 자존감이나 심리적 성숙이 높아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익혀왔습니다. 이제 나를 해칠 수 있는 것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만큼,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내가 변해 있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글쓰기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내 민낯을 드러낸 것 같아 당황스럽다. 이런 내 생각과 글을 단 한 번도 상대방이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통해서 과거의 내가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 얼마나 애썼는지, 얼마나 솔직하게 나를 표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과거의 나 자신에게 감사한 생각까지 든다. 정말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을 읽으면서 깊은 공감과 위로를 주는 문장들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실패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일희일비는 고사하고 '일비일비'할 필요가 없음을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모든 실패에 매번 패배감으로 반응해주지 말아요.  
때로는 아무리 아파도 내 의지나 바람과 상관 없이 결국 안 되는 것임을.  
그 일이 아주 그렇게 당신 탓은 아님을,  
또 당신이 누군가에게 엄청나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아님을 알아주세요. 


다들 되게 생각 있어 보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삶에 뭔가 큰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기능적 요소라기보다는 상처 입고 고단했던 자기애가 남긴 하나의 증상 같은 것입니다. 삶에 큰 의미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의미입니다.  그것으로 당신은 다 한 겁니다.  
살아 있는 부모, 살아 있는 친구, 살아 있는 자식, 살아 있는 나, 그거면 됐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수습하면서 살다가 문득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이 잦아지고,
또 그다음엔 남에게 기여도 좀 하고요. 시간이 지나 그렇게 쌓인 일상이, 의미라면 의미겠지요.   


원래 정상인 사람은 없고 마냥 행복한 가정도 없지요. 프로이트는 정신적 ‘정상’ 상태를 ‘약간의 히스테리a little hysteric’ ‘약간의 편집a little paranoid’ ‘약간의 강박 a little obsessive’으로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이렇죠, 뭐.
우리는 충분히 불충분하고 완전히 불완전합니다.


성취로 정체감을 형성하지도 말아요.  
직장에서 꼭 자아실현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아 실현은 직장에서 모은 돈을 가지고 다른 곳에서 해도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돈을 모아 기부하면 됩니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다면 직장 생활로 모은 돈을 가지고 좋은 세미나 그룹을 찾아 참여하거나 모임을 스스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속한 그룹의 대표성을 굳이 짊어지고 성취를 이루려 하면 그만큼 수행 수준이 낮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을 모릅니다.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된 무의식-전의식-의식의 구조 사이사이에 어떤 기억과 감정이 숨어 있는지 여전히 모릅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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