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여자라서 유난히 버거운 일이 무어냐고 물었다. 사는 건 원래 버거운 일이다.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식물에게도 사는 게 버거운 순간은 언제나 있다. 버겁다가도 거기서 잠시 즐거움을 찾으며 쉬고, 다시 버거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자라서 유난히 버거운 일은 무엇일까. 나는 여자라서 버겁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십여 년쯤 전에, 대낮의 지하철에서 성추행당한 적이 있다. 그때는 누군가가 나를 더듬는다는 사실에 너무 무서워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다 더 큰 화를 당할까 봐 무서웠다. 당시에는 그 일에 성추행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 가임여성으로서 원치 않는 임신을 조심해야 했던 나이에, 나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자궁이 어떤 구조로 생겼는지는 알았지만, 피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여성의 성은 감춰야 하는 부끄러운 것이었고, 수동적이어야 했다. 나는 성을 경험으로 배웠다. 그러니까 포르노와 친구들 간의 대화로 성을 배운 남성들을 통해서 성을 배웠다. 그렇게 배운 여성의 성의 목적은 남성을 만족시키는 것과 후손을 만드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그릇된 성인식이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 프랑스 십 대들의 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성 간의 성으로 제한되어 있는 다큐멘터리였다) 보통 만 13-14세가 되면 첫 성관계나 그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성이 인생의 커다란 주제가 되는 첫 번째 시기가 바로 이 나이대 같았다. 성은 십 대들의 사회생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누구는 이미 첫 경험을 했고 누구는 그 비슷한 것을 했으며, 어떤 과정으로 하고, 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 얻으며... 이런 것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그것에 대해 잘 아는 체할수록, 그리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수록, 그 사회에서 승자가 되었다.
아이들 교육에 미리, 조금씩 신경 써야겠다고 느낀 건, 대부분의 아이가 십 대의 성을 마치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 생각하고 조바심을 내는 경우가 있다는 점, 여성의 거절은 진짜 거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가 여자가 남자를 만족시키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하고 포르노나 매체를 통해 성을 배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이십 년 전에도 고민하던 문제가 요즘 십 대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이 놀라웠다. 요즘같이 여성에 대해 열심히 말하는 시대에도 십 대의 성은 여전히 무지하고 취약한 분야였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여성인권이 예전에 비해서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것은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공동육아와 같이 열어놓고 말하기 비교적 편한 분야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단순히 열린 성교육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올바른 성인식과 더불어 누가 되었든 거절은 존중해야 하며, 모두의 신체 경계선이 다름을 알고 서로 지켜줘야 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 타인과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존중에는 힘의 논리나 지배 논리가 따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십 대의 성 문제도 자연스럽게 잘 풀어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