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이동 le déplacement에 관하여.
인류는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움직임을 포착하고자 했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라코스 동굴 벽화에서는 여러 개의 선을 겹쳐 동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려 했던 시도들을 볼 수 있으며, 이후 다른 유적지들에서는 움직이는 동작을 여러 개의 그림을 나열해 표현한 벽화들, 즉 움직임을 연결된 상세한 동작으로 하나씩 그린 벽화들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그림을 통해 움직임을 포착하려던 노력은 기계, 즉 카메라를 통한 움직임의 포착으로 나아간다. 1872년 영국에서는 경주마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유행한다. "말이 속보와 습보로 달릴 때 네 발굽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는가?" 그리고 영국의 사진가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Eadweard Muybridge는 말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는 이를 위해 트랙을 따라 하얀 배경을 만들고 실로 연결된 사진기 12대를 1피트 간격으로 나란히 설치했다. 그리고 뛰어가는 말이 실을 끊으면 자동으로 사진이 찍히도록 고안해 연속된 12장의 사진을 얻었다. 그의 실험은 육안으로 포착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까지 잡아내 흐르는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해냈다. 하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움직임을 그대로 포착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움직임을 정지된 하나의 프레임에 가두고 그것을 연속으로 놔두었을 뿐, 움직임 자체를 포착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시네마토그래프가 시작된 후, 영화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과 움직임을 동시에, 그리고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예술로 자리 잡는다. 움직임은 결국 변화를 일으킨다. 이 움직임을 통한 변화와 그것이 발생하는 동안 흐르는 시간을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영화 이미지뿐이다. 회화나 사진이 석양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색채와 그 점진적 과정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화는 현실 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움직임, 특히 움직임의 과정을 포착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스스로도 움직임의 특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영화에는 어떤 형태의 이동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까?
이동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불가분의 요소이다. 프레임 안의 내용물이 움직이든, 카메라가 움직이든 우리는 늘 영화 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본다. 이 중 트래킹 쇼트는 영화만이 가진 독특한 영화적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트래킹 쇼트의 기본적인 활용 중 하나는 카메라가 피사체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피사체에게 다가가거나 멀어지는 것이다. 이 기본적 활용에 충실한 영화의 예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Friedrich Wilhelm MURNAU의 <마지막 웃음 Der letzte Mann> (1924)의 한 장면을 들 수 있다. 카메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호텔 회전문으로 향하는 트래킹 쇼트를 보여준다.
이 이동이 회전문 앞에서 멈춤으로써 관객은 감독이 이 회전문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는 카메라 덕분에 우리는 회전문을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그 어떤 표정의 변화와 미동도 없이 기계적으로 회전문만 돌리는 호텔 직원. 그 직원은 안중에도 없이 그곳을 빠져나가는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고객들. 관객은 여기서 사회적 차별과 대면하게 되며 그 안의 불평등을 발견한다. 이러한 기본적 트래킹 쇼트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고 변화되어 사용되었다. 가령 더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알제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두 젊은이를 그린 타리크 테기아 Tariq TEGUIA의 <당신보다 로마 Roma wa la n'touma> (2006)에서는 피사체가 존재하지 않는 트래킹 쇼트가 등장한다. 이 트래킹 쇼트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촬영되었으며 프레임 안의 두 남녀는 길을 찾고 있다. 두 남녀 조차도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피사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트래킹 쇼트는 무심하게 아무것도 찍지 않는 듯한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자동차 창문 너머의 부서진 건물들, 그리고 어두운 두 남녀의 뒷모습뿐이다. 타리크 테기아는 전쟁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다기보다는 그것이 남긴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본 것들을 촬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덕분에 이 트래킹 쇼트는 꽤 유령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관객은 마치 전쟁의 폐허를 떠도는 영혼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물론 카메라뿐 만이 아니다.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인물의 움직임을 본다. 인물의 움직임은 인물의 운명이나 심리상태를 반영하기도 하고 반대로 움직임의 주체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프랭크 카프라 Frank CAPRA는 “우리는 왜 싸워야만 하는가 Why We Fight” (1942)에서 똑같은 걸음으로 행진하는 다수의 군인들을 보여준다. 사실 이 시끄러운 이동은 힘에 대한 환영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으나 우리 눈에는 그저 가치 없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동일하며 개별적인 수 많은 움직임으로 구성된 이 거대한 집단적 움직임은 부자연스럽고 끔찍하다. 기계와 같은 이러한 움직임은 전쟁으로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군상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Pier Paolo PASOLINI가 1961년에 만든 "아카토네 Accattone" (1961) 속 인물의 이동은 좀 더 인물과 닿아있다. 그들은 걷는다. 이 이동에는 목적도 생리적 욕구도 없으며, 인물의 이성적 동기도 없다. 그들은 걷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변화하고 진화하는 세상 속에서 그들의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운명을 향해 걸어간다.
50년대 이탈리아는 경제적 급성장을 이룬다. 산업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고 도시들은 변화를 겪는다. 이는 파졸리니 작품의 중심이 되었고 그는 이것을 자주 자신의 작품 배경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그들이 걷는 도시는 희생, 산업화 그리고 자본화의 상징이 되었으며, 공간이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인물들은 이 거대한 운명에 짓눌리고 만다.
2-1. 시간.
앞서 언급했듯,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은 영화뿐이다. 영화는 당장 현재 흐르고 있는 시간의 결을 표현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40년이라는 긴 시간의 이동도 하나의 이미지 안에 담아낼 수 있다. 마티 디옵 Mati DIOP의 "천 개의 태양 Milles Soleils" (2013)은 1972년에 만들어진 "투키 부키 Touki Bouki"와 2013년에 만들어진 "천 개의 태양" 사이의 시간의 이동과 한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의 미끄러지는 듯한 이동을 시적인 영화 이미지로 보여준다. 마티 디옵은 이 40년의 시간을 늙어가는 카우보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리는데, 이를 위해 "투키 부키"의 상영회를 이용한다. 그는 젊음과 패기를 발산하며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스크린 속 남자 주인공 (마가예 니앙 Magaye NIANG)과 40년이 지나 상영회에 온 늙은 배우 마가예 니앙이 술에 취해 앉아 있는 모습, 젊은 마가예 니앙이 뛰는 모습을 잡은 영화 속 트래킹 쇼트 장면과 취해서 천천히 걷는 노인 마가예 니앙의 모습을 통해 움직이는 것과 정체하는 것의 대조를 보여주고 관객에게 이 두 가지 속도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체감하게 해 준다. 이로써 관객은 하나의 시퀀스에서 40년 사이의 간극, 시간의 이동을 보게 된다. 그녀는 또한 시선 연결을 통해 40년의 시간을 넘나 든다. 마가예 니앙은 관객들 사이에서 "투키 부키"를 감상한다. 여기서 "투키 부키"의 여자 주인공인 앤타 Anta와 "천 개의 태양"의 주인공 마가예 니앙의 시선 교환이 이루어진다. 아직 젊은 앤타와 이제는 늙고 무기력해진 마가예 니앙이 서로 시선을 교환할 때, 그 사이로 40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며 우리는 마가예 니앙의 후회를 본다. "천 개의 태양"의 후반부에서 마가예 니앙은 미국에 사는 앤타에게 전화를 거는데, 이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시선 연결이 발생한다. 마가예 니앙은 전화를 걸다가 바깥에 서있는 오토바이의 젊은이를 발견한다. 그 젊은이는 마가예 니앙이 "투키 부키"에서 타던 것과 비슷한 오토바이에 걸터앉아 스카프를 덮어쓴 얼굴로 마가예 니앙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마치 늙은 마가예 니앙에게 40년 전의 나는 이곳에 있으며, 당신은 돌아갈 수 없으니 이제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늙은 마가예 니앙은 여전히 과거에 메여 앤타에게 전화를 건다. 이렇게 우리는 영화 속에서 40년의 간극과 노쇠, 그리고 시간의 이동을 보게 된다.
아모스 지타이 Amos GITAÏ가 1989년에 만든 "베를린-예루살렘 Berlin-Jerusalem"의 마지막 시퀀스는 1945년에 사망한 한 시인이 80년대의 거리를 거닐다 프레임에서 사라지고, 트래킹 쇼트가 지속되다 끝이 난다. 이로서 이 시퀀스는 시간과 공간을 이동시키며 사라진 시인이 유령인 듯한 느낌을 준다. 카메라가 이동하며 예루살렘의 풍경을 보여줄 때, 어느 순간 사운드가 중요한 위치를 취한다. 관객은 서로 다른 언어로 나오는 여러 개의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유령의 모습을 한 트래킹 쇼트를 따라 예루살렘의 모습을 본다. 여기에는 소리의 이동, 공간의 이동 그리고 시간의 이동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렇게 관객은 한 시퀀스에서 다양한 영화적 이동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2-2. 로드무비.
아서 펜 Arther PENN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1967), 빔 벤더스 Wim WENDERS의 "도시의 앨리스 Alice in den Stadten" (1974)와 함께 로드무비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영화가 바로 데니스 호퍼 Dennis Hopper의 "이지 라이더 Easy Rider" (1969)이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동을 쫓아가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미국의 역사와 사회의 단면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행 초반, 주인공들은 시골 마을에 도착하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들은 눈에 띄게 다른 차림새를 한 이들에게 적대감이 없이 대하며 심지어 점심식사도 대접한다. 영화는 시골의 대가족을 정형화된 미국 가정의 모습으로 그리며 시골 생활이야 말로 진짜 미국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반면 두 주인공이 뉴올리언스 쪽으로 갈수록 미국의 모습은 추악해진다. 어느 도시의 퍼레이드에 난입했다가 유치장에 갇힌 두 주인공은 한 변호사를 만난다. 그 변호사는 두 주인공의 차림새와 긴 머리를 보며 이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유치장에서 나가게 해 줄 수 있겠냐는 주인공들의 부탁에 변호사는 백인만 죽이지 않았다면 풀려나게 해 줄 수 있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한다. 이를 통해 흑인 노예의 시대는 끝났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미국 사회를 볼 수 있다. 영화는 변호사와 두 주인공의 새로운 로드트립을 통해 다시 한번 미국 내 극심한 인종차별 문제를 보여준다. 세 사람이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백인과 흑인의 빈부격차, 백인 밖에 없는 식당,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식당 손님 등이 그들이 마주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독일의 로드무비 역시 독일의 역사와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르였다. 전쟁 후 독일 영화는 조국으로의 귀환에 관심이 많았는데, 1970년, 로드무비가 이 경향에 마침표를 찍으며 자리 잡는다. 영화인들은 로드무비를 통해 개인의 여정들이 일시적으로 만나는 장소인, 세상으로의 귀환을 이야기한다. 빔 벤더스의 "잘못된 움직임 Faux Mouvement" (1975) 속의 이동은 인물 자기 자신으로 향하고 있으며 인물에게 불가능한 일들과 막다른 곳으로의 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비가시적 이동은 정체성의 이동이다. 아모스 지타이는 이 비가시적, 내적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 "케드마 Kedma" (2002) -유럽에서 팔레스타인 해안으로 유대인 생존자들을 이송해주는 화물선 (네이버 영화)- 에서 다양한 가시적 장치를 사용한다. 일단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이동이 일어난다. 영화 자체가 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프레임 안에는 이동이 가득하다. 이민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날아가는 철새들의 모습, 주인공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인물들의 동선 디자인 등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배 위에서 로사 Rossa가 자신의 이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주변 인물들이 그들 앞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며, 영화 도입부에 카메라가 배 위로 이동할 때도 여기저기로 이동하는 가방들이 카메라의 움직임과 일정한 리듬을 맞추며 움직인다.
배에서 내린 인물들은 어디론가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들은 이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이동하는 곳은 길조차 없는 알 수 없는 그런 곳이다. 그들은 목적지가 어디인지 언제까지 이동해야 하는지 모른 채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런데 이러한 물리적 이동 말고도, 사고의 내적 이동 또한 영화 속에 존재한다. 인간의 의식의 흐름은 무형의 것으로 그것을 시각화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영역을 차용해야 한다. 지타이는 이것을 위해 얼굴과 풍경을 이용한다. 인간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하고 섬세한 것들이 숨어있는데, 그것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클로즈업이다. 언어는 완벽하게 거짓말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얼굴은 언어만큼이나 완벽하게 거짓말을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가 멀리서 보았을 때는 속을 수도 있는 얼굴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보게 될 경우, 우리는 그 얼굴 뒤에 숨어있는 무언가 미세하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얼굴을 통해 '행간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1]
로사와 다른 이민자들은 영국군의 공격을 받는다. 로사는 영국군을 피해 한숨 돌리지만 아직도 그 앞에는 힘겨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로사의 얼굴과 영국군에게 쫓기는 사람들이 보이는 바닷가 풍경의 오버랩은 고난과 실망이 가득하면서도 약간의 희망을 숨기고 있는 그들의 삶을 공간적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로사의 얼굴은 풍경이 된다.
우리는 이민자나 난민을 외부자로 취급하고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느낀다. 이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케드마의 한 이민자에게 그들을 돕는 군인이 노래를 부탁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지만 군인들은 관심이 없다. 오히려 청승맞다며 더 신나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민자나 난민들은 이해받지 못하고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끊임없이 이동한다. 작가 무스타파 무라드 알-바다 Mustafa Murad al’Dabbagh는 그들은 결국 이동 상태로 남아있게 되며 그들 자체가 영토가 된다고 말했으며,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 Mahmoud Darwich는 망명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이 되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민자들의 끊임없는 이동은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정체정을 옮겨오다 실패하고 그 자체가 정체성이 되고 만다.
이동은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감을 의미한다. 다른 자리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이미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먼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여기에 더해 필요한 또 하나의 조건은 바로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출신이지만 파리와 이스라엘에 거처를 두고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고 있는 아모스 지타이 감독은 "약속의 땅" (2004)에서 다양한 이동 : 핸드헬드 카메라의 이동, 타인에 의해 강제로 이동을 당하는 사람들, 교차편집을 통해 자유롭게 이동하는 시간 등을 통해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이동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다. 세상에서 그들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들의 자리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누군가에 의해 강요되는 이 움직임은 누구를 위해, 어떤 이유로 시작된 것일까? 그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차지할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영화는 낙타를 타고 이동하는 한 무리로 시작한다. 어둠 속 희미한 달빛 아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누가, 왜 이동하는지 알 수 없다. 이어 나타난 모닥불 앞의 남녀를 보고서야 그들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 그들의 대화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 변변한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왜 떠나는 건지 알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는 여자들이 앞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모른 채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게 된다.
여자들은 자신들을 이동시키는 사람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가축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유린당한다. 이들의 이동은 멈출 줄 모르며 강제적이다. 덮개로 씌운 트럭 안에 갇힌 이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이동한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가 자신이 보는 풍경을 다른 여자들에게 설명해준다. 풍경을 유심히 살피고, 알지 못하는 외국어 간판 속에서 하나라도 아는 단어를 찾으려 애쓰는 이 여자의 행위는 자신의 이동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의 정체성은 아직 떠나온 자리에 남아있다. 하지만 자신의 현재 위치, 이동의 방향을 파악함으로써, 그것을 현재 행해지고 있는 이동으로 가져오려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 노력은 계속되는 이동 과정에서 더 강한 통제와 방해를 받는다. 이동 중간, 두 명의 여자가 하차하게 되는데 하차 전,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강제로 무슬림 여성의 의복을 입히고 베일을 씌운다. 그중 한 여자는 강하게 거부하다 한차례 뺨을 맞는다. 여기서 강제적으로 정체성이 변화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강요된 이동으로 본래의 정체성이 불안해져 가는 상황에서 억지로 베일을 쓰고 거의 끌려가다시피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과 거부하는 몸짓 속에 자꾸만 벗겨지는 베일은 어떻게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자신의 본래의 자리를 찾으려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강제화된 이동 속에서 그녀의 몸부림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머지 여자들은 어느 현대식 건물로 이동된다. 사람들은 이들을 강제로 벗기고 샤워실에 넣은 뒤 물을 뿌려댄다. 여기서,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이들은 점점 비인격화됨과 동시에 상품화되어가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해가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이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을 떠올리게 하면서 더 끔찍한 인상을 남긴다. [2]
정체성의 이동이 그녀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여자 포주인 한나 Hanna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자신의 약탈품 중 하나인 어떤 여자에게 자신의 이동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그녀를 위로한다. 물론 그 이동은 강요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각 이동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며 살아남았다. 사랑에 미쳐 모든 것을 버리고 독일에서 이스라엘로 넘어온 순수했던 여자는 이제 여성을 상품화하는 자가 된 것이다. 과거의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냐는 질문에 한나는 그가 죽었을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다고 대답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그녀조차도 자신이 이동을 하며 정체성을 지켜올 수 있었는지, 아니면 이제는 그녀에게도 이동 자체가 정체성이 되어버린 건지 알지 못한다.
여자들의 이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여전히 이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이 이동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알지 못하고,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어둠을 달리던 차가 멈춘다. 이들에게 이동이 멈춘다는 것은 또 다른 고난을 마주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들은 움츠러든다. 이들은 멈추고 싶지 않다. 이동 자체가 그녀들의 정체성임을 받아들이고 싶다. 하지만 차는 멈추고 운전사는 다짜고짜 한 여자를 끌어내린다. 운전사는 그녀를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그렇게 그녀가 이동을 시작할 때 가졌던 정체성은 무너진다.
이들은 드디어 ‘약속의 땅 Promised Land’에 도착한다. (모순되게도 그녀들이 일할 매춘업소의 이름이 바로 '약속의 땅'이다.) 약속의 땅에 도착했으니, 그녀들의 이동은 끝난 것일까.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감독은 이들이 이동을 시작하기 전에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준다. 약속의 땅에서 이들의 몸을 게걸스럽게 탐하는 남자들, 벗겨지고 농락당하며 고단한 이동을 해온 여자들의 모습이 이 여자들의 기억 : 그들이 본 고양이, 어린 시절 성당에서 노래하는 모습과 번갈아가며 나오는 것이다. 기억 속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하던 디아나와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보던 로즈는 이제 '약속의 땅'이라는 매춘업소에서 언제 능욕당할지 모른 채 허름한 침대 안에서 서로에게 어깨를 맞댄다.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의 유대감과 이제는 잃어버린 그들의 예전 자리들을 동시에 보고 있노라면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이 밀려온다. 빗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이 교차편집은 그들의 정체성이 물리적 이동을 겪으며 어떻게 이동해왔는지 보여준다.
그들이 도착한 '약속의 땅'은 항구 근처에 자리하고 있으며, 바로 앞에는 기차도 지나다닌다. 항구는 지나가거나 떠나는 장소이며 잠깐 머물다 떠나갈 돈과 상품들의 상징적 거점이다. [2]
이전의 자리와 현재의 자리의 교차편집 이후, 기차 소리와 함께 한 여자의 독백이 나오는데, 그는 자신들이 조각이나 그림처럼 하나의 물품이 되어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포주들이 하는 일은 자신들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의논하는 것이라고 덧붙이는데, 화면 속 여자들은 벌거벗겨져 상품으로써의 가치를 판단을 받고 있다. 그녀들은 이제 항구에서 오고 가는 물건들처럼 '약속의 땅'에서 파는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이다. 이동하는 동안 잃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노력했던 자신들의 정체성은 결국 그들이 한때 차지했던 자리에 남아있고 물리적 이동의 과정에서 현재 존재하고 있는 자리로 가져오지 못했다. 폭력과 수난으로 얼룩진 이동이 남긴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육체와 체념뿐이다.
이러한 체념은 그들의 이동이 (물리적 이동이든 정체성의 이동이든) 끝난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내레이션은 기차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이동을 의미하는 기차소리. 그들의 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일까. 폭발음과 함께 시작한 다음 장면은 그들의 이동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다준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한 화재사고 현장에서 디아나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유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은 이동을 시작하며 강제로 탈의당하고 겁에 질려 몸값을 평가받던 모습과 교차된다. 영화는 새로운 이동을 알린다. 로즈는 디아나의 손을 잡고 무작정 걷는다. 실성해서 난 이제 자유라고 외치는 디아나와 함께 다시 한번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는 이동을 시작한다. Time to reborn (다시 태어날 시간)이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노래 덕분에 그들의 이동이 그들에게 어떤 또 다른 정체성을 가져다줄지 기대하게 되면서도 이미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이동을 본 우리는 이 새로운 이동에 마냥 희망적일 수 없다.
실제 사회 현상을 바탕으로 많은 고증을 거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형식은 반대로 매우 몽환적이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약속의 땅'에서의 현재와 '약속의 땅' 이전의 과거를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주며 시간과 공간을 이동한다. 특히 로즈가 과거의 기억에서 창밖을 보는 장면은 노래와 함께 현재의 '약속의 땅'으로 이어지는데, 로즈의 시선과 맞물려 과거의 그녀가 현재의 비극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영화의 성질도 현실주의에서 몽환 주의로 넘어가는 이동이 발생한다.
여자들의 이동을 따라가는 핸드헬드 카메라의 이동은 그들의 이동만큼이나 혼란과 고단함으로 가득하다. 특히 여자들을 경매하는 장면에서 거칠게 흔들리는 카메라와 플래시는 혼돈 속에서 서서히 자리를 잃어가는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밀실 공포를 자아내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카메라가 고정된 장면은 하나도 없이 영화 전체가 핸드헬드로 촬영되었지만, 여자들의 이동을 보여줄 때와 아닐 때의 핸드헬드의 느낌은 다르다. 그들의 이동을 쫓아가는 카메라는 마치 그들 중 한 명의 시선인 것 같다. 카메라는 땅을 훑기도 하고 정신없이 사방을 훑어보기도 한다. 단순히 인물이나 사건을 카메라에 담는 움직임이 아닌 강제된 이동 속에서의 여자들의 두려움이 카메라의 시선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면 다른 인물들, 예를 들면 그들을 운반하는 남자들을 찍을 때에는 비교적 안정적 모습을 보인다.
아모스 지타이는 이 영화를 통해 영화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이미지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이동을 이용하여 비인간화되는 인간들과 그들의 정체성이 이동하거나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미디어 아트, 정동암, 커뮤니케이션 북스
[1] 벨라 발라즈, 영화의 이론, BALÁZS Béla, Theory of the film, l’édition London Dennis Dobson LTD, 1952, p. 75. 직접 번역.
[2] 두앙, 장-뤽. "약속의 땅" : 아모스 지타이가 이스라엘의 인신매매에 대한 영화를 찍다, DOUIN, Jean-Luc. “Terre promise”: Amos Giltaï filme la traite des corps en Israël, date de consultation: 03.janvier.2016, <http://www.lemonde.fr/archives/article/2005/01/11/terre-promise-amos-gitai-filme-la-traite-des-corps-en-israel_393840_1819218.html>